<무한도전>의 성공법칙 첫 번째는 끊임없는 도전과 변화이다.
ⓒ IMBC
 

드라마에도 시기마다 시청자들이 선호하는 바가 있고, 그것에 따라 조금씩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변화한다. 그러한 면에서 볼 때 예능프로그램의 변화는 드라마 쪽보다 속도가 빠르고, 쉽게 변화해야 오래도록 인기프로그램으로 장수할 수 있다.


그래서 장수하는 프로그램은 한 포맷으로 몇 십년 유지한 것이 아니라 시기마다 적절한 변화를 꾀하며 포맷에 변화를 주어 살아남았다. 가령 <일요일 일요일 밤에>는 몰래카메라로 인기를 얻은 뒤, 양심냉장고, 인간극장 등의 포맷으로 꾸준한 변화를 시도했고, 그것이 시청자들에게 눈길을 끌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실 예능프로그램은 드라마보다 더 치열한 전쟁터인지도 모르겠다. 그중에서 시청자들의 변화의 흐름에 부흥하는 프로그램이 바로 <무한도전>이다. 어쩌면 그러한 흐름의 변화를 보여주는 유일한 프로그램일지도 모른다. 특히 그러한 변화를 몸소 선도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무한도전>의 인기는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가령 <상상플러스>를 보자.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프로그램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래서 예능프로그램도 KBS가 장악하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노현정 아나운서를 앞세운 <상상플러스>는 '세대공감 올드 앤 뉴'는 전성기를 구가했다.


사실 <상상플러스>는 스타를 초대해 네티즌들의 댓글을 읽어주는 형식으로 처음 안방극장을 찾았고, 두 번째 변화를 꾀한 것이 바로 '세대공감 올드 앤 뉴'였고, 그것이 안방극장에 거센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지금은 그 프로그램의 포맷에 변화를 주는데 실패해 인기가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매주 <무한도전>은 우리에게 어떠한 내용을 가지고 안방극장을 찾을지 기대감을 부풀어 오르게 하며, 시청률이 간혹 20%를 넘는 수준이지만 체감 시청률은 최고라고 할 수 있다. 케이블 TV에서 어느 채널에서 무한재방송을 하는 걸 보면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그리고 매주 새로운 포맷으로 우리의 기대에 부흥하고 있는 <무한도전>의 생존 필사기는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끊임없는 도전이 만든 변화의 웃음!


<무한도전>은 사실 '세대공감 올드 앤 뉴'의 형식을 따라하고 싶은 마음에 '마봉춘'을 등장시켜 비슷한 포맷을 유지하되, 그 퀴즈의 수준은 상당히 유치할 정도의 것들로 구성했다. 그래서 장시간 그러한 포맷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무한도전>은 매주 조금씩 다른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무한도전>은 생존하고자 매주 네티즌들의 반응을 살피며 비난에 가까운 힐난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조금씩 수정․보완해 나갔다. 그것이 <무한도전>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방법이지만 지금의 성공요인으로 작용한다.


즉 그러한 프로그램의 포맷을 보완하면서 매주 다른 포맷으로 변화를 주게 되었고, 결국 <무한도전>은 어떠한 기본적인 포맷이 없는 예능프로그램으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때문에 어떠한 포맷을 끌어와도 모든 걸 소화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성장했다. 아마도 <무한도전>이 사랑받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포맷 자체가 열려있다는 점일 것이다. 


물론 정해진 것이 없다 보니 사실상 매주 네티즌들의 호응을 얻는 것은 아니다. 때론 비난의 목소리도 듣기도 하고, 때론 호평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 사실상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제작진은 물론이고, 출연진들도 힘이 들 수밖에 없다. 늘 위기를 맞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무한도전>은 그 위기를 기회로 만들고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을 얻었다. 그것은 끊임없이 도전하는 그들의 실험정신 덕분이다. 사실 예능프로그램에서 주로 꽁트, 퀴즈 등의 형식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해 출연해도 정식 패션쇼에 모델로 도전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6명의 멤버 모두 '웃겨야 산다'를 좌우명으로 가진 듯 웃기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는다.
ⓒ IMBC

그런데 <무한도전>의 멤버들이 이상봉 디자이너 쇼 무대에 출연해 모델로 나가 당당한 워킹을 선보였다. 그리고 모델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신선한 반응을 이끌어 냈고, 시청자들은 그들의 도전에 박수를 보냈다. 이처럼 아무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무한도전>은 무모할 만큼 도전정신이 투철하다.


물론 그래서 때로는 오히려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대부분 그들의 도전은 칭찬을 받는다. 적어도 그 도전하는 정신만큼은 프로그램의 재미와는 별개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도전은 참 많다. 방송국 앞에서 잠을 잔다든지, 드라마 형식으로 꾸민다든지, 버스로 서울구경을 하러 간다든지 하는 등의 도전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웃음 경쟁, 빛을 발하다!


그러한 도전 정신을 바탕으로 사실상 6명의 멤버들이 각자 하나의 캐릭터로 설정해 보여주는 개그는 이제 친숙할 대로 친숙하다. 그래서 그들이 무얼해도 시청자들은 웃는다. 정형돈이 어설픈 개그를 해도 웃고, 박명수가 여전히 자신을 거성으로 지칭하며 호통개그를 해도 웃는다. 그만큼 <무한도전>의 변화는 시청자들에게 이젠 익숙한 패턴으로 다음 주에는 무엇을 할까, 하는 기대를 자연스럽게 품게 만드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에 6명의 멤버들은 사실 고통스럽겠지만 '웃겨야 산다'를 좌우명처럼 여기는 듯한 인상이 풍길 정도로 모두들 몸을 사리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은 모두가 서로서로 친하지만 끊임없이 웃음을 경쟁하고 날이 갈수록 재미를 더한다.


 
<무한도전>의 변화는 오히려 예능프로그램의 변화를 선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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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6명의 멤버들은 고정적인 캐릭터를 구축해 그 안에서 웃음을 완급 조절해 나갔다. 가령 박명수는 거성으로, 정형돈은 어설픈, 노홍철은 돌아이로. 그래서 그 안에 고정적인 캐릭터를 완벽하게 구축해 놓고 일정하게 간극을 유지하면서 서로 힐난하거나 배신을 일삼으면서 웃음을 유발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무한도전>의 캐릭터를 다른 방송에서도 유지하면서 영역을 확대해 나갔고, 박명수는 유재석의 인기에 버금가는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들 표현대로 드디어 2인자가 된 것이다. 그런데 <무한도전>은 포맷 자체가 늘 변화하듯, 변화를 6명의 멤버들에게도 고스란히 적용했다.


그것은 바로 웃음경쟁이다. 힐난과 배신 등으로 웃음을 유발하더니 이젠 개개인이 서로를 경쟁상대로 여기고 서로 웃기려고 무진장 애를 쓰기 시작했다. 그 사이 몸개그가 다시 부활해 실미도편에서 자학적인 몸 개그를 보여주기도 했다.


'미스코리아', '워터보이즈'에서  몸 개그 경쟁을 펼쳤고, '강변북로 가요제', '서울구경'도 마찬가지다. 끊임 없이 웃음 경쟁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표면화한 것이 바로 '네 멋대로 해라'이다. 6명이 각자 6개의 코너를 연출하는 형식으로 정형돈이 연출한 '체인지'는 서로의 캐릭터를 바꾸어 얼마나 웃기는지 진짜 개그실력을 겨루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래서 정형돈이 연출한 '체인지'는 웃음경쟁을 하고 있음을 시인함과 동시에 그들이 시청자들을 웃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는지 간접적으로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이 빛을 발하며 6명 멤버가 보여주는 개그에 우리는 웃는다. 그리고 다음 주를 기대한다.


이 정도면 <무한도전>이 제목 그래도 끊임없이 도전을 펼치면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정당한 권리를 부여받았다고 해도 과장은 아니지 않을까. 다음 주에 펼쳐진 쇼는 무엇인지 그야말로 기대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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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의 일대기를 다룰 <태왕사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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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9월 10일 스페셜 방송을 시작으로 <태왕사신기>(연출 김종학 윤상호 극본 송지나 박경수)가 시청자 앞에 첫 선을 보인다. 거대한 스케일과 천문학적인 제작비, 그리고 한류스타 배용준의 캐스팅 등으로 화제를 낳은 <태왕사신기>는 네 차례나 방영이 연기되면서 많은 논란도 일으켜왔다.


이제 첫방송을 앞두고 다소나마 안정이 된 것처럼 보이지만 <태왕사신기>는 여전히 논란이 될 요소를 떠안고 있다. 지금부터 5가지 측면에서 <태왕사신기>의 문제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광개토태왕의 일대기를 24부에 제대로 담을 수 있을까?

 

우리나라의 사극은 보통 50~60부작 정도로 기획되어 방영이 되고 있다.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주몽>(연출 이주환 김근홍 극본 최완규 정형수 정인옥)이나 <여인천하>(연출 김재형 극본 유동윤)처럼 연장이 되어서 80부작 내지는 100부작 이상으로 중간에 변하는 경우도 있다. 아니면 <대조영>(연출 김종선 극본 장영철)이나 <불멸의 이순신>(연출 이성주 김정규 극본 윤선주)처럼 처음부터 100부작 이상으로 기획되는 작품도 있다.


이에 비해 <태왕사신기>는 24부작으로 앞서 언급한 사극들에 비하면 무척 짧은 편이다. 물론 <태왕사신기>처럼 짧은 사극이 그동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사 박문수>(연출 정인 극본 고동률 유진희)는 15부작이었고 최근 막을 내린 <한성별곡-正>(연출 곽정환 극본 박진우)는 8부작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런 작품들은 그 시대의 일부 에피소드를 토대로 구성한 드라마였기에 <태왕사신기>와는 성격이 다르다. <태왕사신기>는 광개토태왕이라는 인물의 일대기를 그릴 작품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24부작은 너무도 짧다는 느낌을 결코 지울 수 없다. 자칫 광개토태왕의 일대기를 제대로 담지 못하고 일부를 조명하는 데 그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낳게 하는 대목이다.


표절 논란을 완전히 잠재울 수 있을까?

 

<태왕사신기>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표절 논란에 휩싸였던 드라마이다. 인기 만화 <바람의 나라>의 작가인 김진씨는 <태왕사신기>가 자신의 작품을 표절했다고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김진씨의 말에 따르면 <태왕사신기>의 시놉시스가 작품의 줄거리와 패턴, 신시의 개념 사용, 사신(四神) 캐릭터 사용 등의 측면에서 볼 때 <바람의 나라>와 흡사한 점이 많다고 하였다.


그러나 재판부는 "두 저작물은 개략적 줄거리와 캐릭터 성격에 있어 일부 유사점이 있지만 원고 김진씨의 작품은 단행본으로 출간된 완전한 형태의 만화인 반면 피고 송지나씨의의 시놉시스는 최종 저작물이 아닌 앞으로 저술할 드라마 시나리오 개요를 정리한 것으로 '실질적 유사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말로 송지나씨의 손을 들어주었다.


표절 논란은 이렇게 하여 일단락되었지만 재판부의 판결은 만화와 시놉시스의 비교하였을 뿐이므로 완성된 드라마가 방영된다면 또 다시 표절 논란이 고개를 들 여지는 얼마든지 남아 있어 우려가 되고 있다.

 

역사 고증, 제대로 되었나?


 
역사 왜곡 논란을 불러일으킨 <태왕사신기>의 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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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몇 사극들이 이른 바 '퓨전사극'을 표방하면서 역사에 대한 고증을 무시한 채 드라마를 제작하여 역사 왜곡 논란을 낳고 있다. <태왕사신기> 역시 정통사극이 아닌 퓨전사극이기 때문에 이런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실제로 지난해 9월 스틸컷이 공개되자 타이틀롤인 배용준의 갈색 염색 머리와 온라인 게임 캐릭터를 연상시키는 두꺼운 갑옷을 두고 역사 왜곡 논란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광개토대왕의 머리가 갈색이란 설정과 두툼한 철판을 이어붙인 듯한 갑옷에선 역사 고증의 흔적을 전혀 찾아보기 어렵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실제 고구려 갑옷은 비늘같은 쇳조각을 촘촘히 이어붙여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 산성에 대한 고증 면에서도 <태왕사신기>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태왕사신기>는 막대한 제작비를 바탕으로 중앙아시아 키르키즈스탄에서 드라마의 상당 부분을 촬영하였다. 그러나 그 지역에는 고구려 산성이 아닌 평지 성이 있을 뿐이기 때문에 여타 다른 고구려 사극처럼 논란에 휩싸일 여지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중앙아시아 키르키즈스탄에서 촬영된 모습
ⓒ MBC
 

 

고구려 사극의 중복, 흥행에 문제 없을까?

 

2006년 <주몽>을 시작으로 우리나라 사극은 '고구려 붐'이 일어났다. <주몽>에 이어 <연개소문>(연출 이종한 극본 이환경)이 고구려 사극의 바통을 이어받았고 <대조영>이 그 뒤를 이어 여전히 인기리에 방영 중이다.


그러나 요즘 들어 고구려 사극이 너무 오래 방영되어 시청자들이 다소 식상해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시대 사극으로의 회귀가 이어지고 있다. 최근 방영되거나 방영 예정인 사극인 <왕과 나>(연출 김재형 손재성 극본 유동윤)와 <이산>(연출 이병훈 김근홍 극본 김이영), <대왕 세종>(연출 김성근 극본 윤선주) 등이 조선시대로의 유턴을 이끌고 있는 작품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또 다시 고구려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태왕사신기>의 방영은 흥행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방송계에는 시청자가 선호하는 트렌드라는 것이 있는데 지금 <태왕사신기>는 그 트렌드에 역행하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일본 자금 유입설에 대한 찜찜함, 불식시킬 수 있을까?

 

 
<태왕사신기>에서 광개토태왕 역을 맡은 배용준
ⓒ MBC
 

<태왕사신기>에는 앞서 말했듯이 천문학적인 제작비가 든 작품이고 그 액수는 430여억원 정도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일본 자금이 유입된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고 있다.


이런 소문에 대해 제작사인 김종학프로덕션에서는 제작비로 일본 자본이 유입됐다는 것은 잘못된 이야기라고 하면서 국내 금융권과 개인 투자자를 통해 조성된 것과 일본에 <태왕사신기> 관련 컨텐츠를 선판매하여 자금을 모았다고 밝힌 바 있다. 일본에서 제작비를 투자받은 게 아니라 순수하게 <태왕사신기>를 미리 수출하여 번 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전 여류 비행사 '박경원'이라는 인물의 삶을 그렸던 영화 <청연>(감독 윤종찬)이 지금의 <태왕사신기>와 비슷한 논란에 직면한 적이 있다.


온라인 상에서 네티즌들이 박경원이라는 인물의 친일 행적을 파헤쳤고 이것이 친일 영화라는 소문과 일본 자금 유입설로 번졌다. 결국 <청연> 관람 금지 운동까지 펼쳐지며 120억을 들인 대작은 흥행 참패를 하고 말았다.


물론 <태왕사신기>는 <청연>처럼 친일 행적이 있는 인물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에서 인기가 높은 한류스타 배용준의 출연 때문에 이런 소문이 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제작사 입장에서는 이런 소문이 결코 좋을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그 찜찜함을 하루 빨리 불식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태왕사신기>는 우리 민족의 최고의 영웅 중 한 명이라고 일컬어지는 고구려의 제 19대 태왕인 광개토태왕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이다. 그런 만큼 시청자들 역시 기대가 무척 클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여러가지 우려 속에서도 <태왕사신기>에 많은 관심을 보일 것이다. <태왕사신기>가 이런 우려를 보란 듯이 떨치고 흥행과 작품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데 성공할 수 있을지 다음주를 주목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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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들른 프랜차이즈 문구점에 손가락만 한 플레이모빌들이 인테리어 소품으로 장식돼 있었다. 즐겨보던 드라마 주인공은 우울할 때면 레고가 쌓인 방에 틀어박혀 조립하고 뜯으며 마음을 풀었고, 인터넷 뉴스에서는 네덜란드 잔드부르트 해안에 갑자기 떠내려 왔다는 2.5미터 크기의 레고 사진이 떠돌며 ‘제2의 트로이 목마가 아닐까’ 하는 음모론이 제기됐다.

어린 시절 멋모르고 뚝딱뚝딱 갖고 놀던 레고나 어른이 돼서야 알게 된, 처음에는 레고라 착각했던 플레이모빌은 특유의 귀여움과 깜찍함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사회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보고 '키덜트 문화'를 운운하겠지만 컬렉터들은 레고며 플레이모빌을 모으는 것은 우표를 모으고, 음반을 모으는 것과 품목만 다를 뿐 같은 취미활동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들이 남다른 품목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있다. 호프만의 동화 <호두까기 인형>에서 클라라가 살아 있는 장난감들을 발견한 것과 같다거나, <트랜스포머>의 샘이 범블비를 얻은 것 같은 기분이라나. 보통의 품목보다 좀 더 생동감 있고, 하나의 새로운 생명체를 만나는 느낌이란다. 사람들 마음속에 침투한 이 조그만 녀석들의 궤적을 좇았다.

렛츠 ‘플레이’ 투게더!

이 둘의 매력은 한 마디로 ‘유희(play)’에 있다. 플레이모빌은 이 키워드를 아예 겉으로 드러내는 반면 레고는 속으로 품고 있는데, 살짝 비틀면 이내 ‘놀다’라는 뜻이 튀어나온다. 1932년 덴마크의 목수 올레 키르크 크리스티안센은 장난감을 만들다가 이름을 생각해냈는데, 바로 덴마크어로 ‘잘 놀다’라는 뜻인 ‘Leg godt’를 줄인 말인 ‘레고’가 그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레고는 1958년에야 지금의 형태를 띠게 됐고 점차 놀이도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친구들인 바비 인형이나 양배추 시리즈 혹은 비행기 모형과 함께 어린아이들의 필수 장난감이 됐다.그에 비해 플레이모빌은 조금 생소하다. 80년대 잠깐 수입됐다가 중단돼 최근까지 소수의 컬렉터들만이 취급해왔기에, 낯설게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독일에서 만들어진 플레이모빌은 1974년 국제 토이페어에서 처음 선보인 이후로 30년 이상을 아이들에게 사랑받아온 국제적인 장난감이다. 심지어 고작 7cm에 불과한 이 피겨들의 생산량이 손을 서로 잡아주면 지구 두 바퀴는 너끈히 돌 정도다.

하지만 어린 시절 놀이도구로서의 추억은 두 장난감에 빠져들도록 만드는 초보적인 모티브에 불과하다. 컬렉터들은 오히려 어른이 돼서 느끼는 색다른 놀이로서의 매력이 더 크다고 말한다. 어렸을 적에는 무작정 블록을 쌓고 인형놀이를 하며 장난감 본연의 기능을 충실히 즐겼지만 어른이 돼서 하는 놀이는 좀 다르다. 정교한 생김새와 다양한 시리즈를 보며 그 다채로움에 감탄하고 자신의 컬렉션을 채우는 귀중한 전시품으로서의 매력도 알게 된다. 이른바 그들에게 이 장난감들은 전시 놀이로서의 ‘유희’다.

레고와 플레이모빌은 다르다?

쭉 진열된 레고 피겨와 플레이모빌 피겨가 있다면 사람들은 과연 잘 구별해낼까? 알고 보면 확연히 다르지만 플레이모빌을 이제야 접하게 된 사람들은 혼동하기 마련이다. 일반적 레고 피겨는 노란 얼굴과 통짜몸매, 짤막한 팔다리, 똑같은 크기를 유지해 구별이 어렵지 않지만 요즘 생산되는 특정 레고 피겨들은 크기나 색, 형태에 있어 자유로워져 플레이모빌과 일견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이럴 때 확실히 구별하려면 일단 피겨의 발바닥을 보면 된다. 레고는 기본적으로 블록인 반면 플레이모빌은 하나의 독립된 모빌이다. 레고의 발바닥에는 레고 블록의 특성을 그대로 반영한 결합구조가 있다. 흡사 문어의 빨판처럼 생겨 피겨를 레고 블록에 세울 수 있고, 레고 블록끼리 결합시켜 여러 가지 다른 모양체를 만들 수도 있다. 그래서 특정한 성이나 해적선 시리즈를 사더라도 창의성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모양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게 레고다. 반면 플레이모빌은 피겨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일반적인 레고 피겨보다 좀 더 정교한 사람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를테면 눈, 코, 입은 그린 것이 아니라 상감청자에서 문양이 그러하듯 다른 색의 재료를 이목구비의 틀에 짜 맞춰 끼우는 사출법을 택한다. 덕분에 지워질 염려가 없어 좀 더 정교한 장난감이 되는 것이다. 발바닥에는 빨판 문양이 없으며 대신 신발 끈과 굽이 표현된 정교한 신발이 신겨 있고 블록이 아니므로 세우기 위해서는 균형을 맞춰줘야 한다. 또 플레이모빌의 집이나 건물에서는 블록형 결합구조가 없어서 부순 뒤 아예 다른 형태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아기자기한 완제품으로써 소장하기 위해 여자들이 더 선호하는 것이 플레이모빌이다. 반대로 레고 컬렉터의 대부분은 남자다. 이들은 뜯고 또 짓고, 마음껏 변형 가능한 레고의 특징을 높이 산다. 특히 성 시리즈나 해적선 시리즈들은 인기 품목이다.

레고와 플레이모빌은 같다?

하지만 두 장난감이 표현해내는 세상은 많이 닮아 있다. 원래 플레이모빌은 실생활을 그대로 재현한 시리즈에 집중하고 레고는 특별한 테마 위주의 상품을 만들었지만, 요즘 두 장난감의 행보는 유동적이다. 플레이모빌은 빅토리안 시리즈를 비롯해 동화 시리즈 등 소장가치가 높은 제품들을 만들어냈고 레고 역시 경찰서나 소방서 등의 일상적인 공간은 물론이고 <해리 포터>나 <스파이더맨><스타 워즈> 등의 영화가 나올 때마다 테마 시리즈를 추가했다. 또한 PC와 연결하는 ‘마인드스톰’이나 로봇 시리즈인 ‘바이오니클’을 출시하면서 사업을 다양화하기도 한다. 그러는 동안 생산된 장난감들은 하나의 세상을 만들었고, 장난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테마파크를 통해 좀 더 사람들이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꾸며졌다. 레고 사는 1968년 덴마크에 최초의 레고랜드를 개장했고 온통레고 블록으로 이뤄진 미니어처 타운을 선보였다. 지금까지 캘리포니아와 독일, 영국까지 총 4개의 지역에 레고파크가 있으며 1999년에는 우리나라의 경기도 이천이 레고랜드 부지로 언급되기도 했다. 한편, 플레이모빌의 테마파크인 '펀파크'는 아직은 독일과 미국 두 곳이 전부다.

어쨌든 레고랜드든 펀파크든 수많은 레고와 플레이모빌이 가득한 환상의 세계임은 틀림없다. 아이들은 무수한 장난감을 통해 세상 곳곳을 먼저 볼 것이며 어른들 또한 한차례 추억에 잠기거나 별천지를 체험할 것이다. 그곳이라면 밤이 돼 장난감들이 살아 움직이거나 범블비처럼 나쁜 무리들을 처단해주는 환상이 이뤄질지도 모르겠다. 그런 꿈이 이뤄진다면 아니 그냥 상상할 수만 있다 해도, 레고든 플레이모빌이든 언제나 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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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고와 플레이모빌, 여기서 만나요

희귀 아이템부터 신제품까지 레고와 플레이모빌을 오프라인으로 만날 수 있는 곳을 소개한다. 마음껏 구경하시라.

토이뮤지엄

지난 4월 개관한 이곳은 레고와 플레이모빌 두 장난감만으로 가득 찬 박물관이다. 관장 이주학 씨는 10년간 모아온 레고와 플레이모빌을 2층 규모의 전시장에 꺼내놓았다. 2층에서는 블록과 조립완구들을 원하면 직접 체험학습 할 수 있으며 정기적인 놀이 프로그램도 있다. 매주 화요일에서 일요일까지 평일은 6시, 주말은 9시까지 연다.

위치 건대입구역 2번 출구 | 입장료 5,000원 | 문의 02-465-5137

인조이 플레이모빌

'천소'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 이정현 씨의 작업실 겸 전시공간 겸 판매처다. 빈티지 아이템을 좋아하는 그가 해외 사이트를 두루 둘러보며 구매한 진귀한 녀석들이 많다. 플레이모빌 외에도 다양한 미니어처와 피겨를 보유하고 있으며 빈티지 아이템을 위주로 판매도 겸한다. 매주 토요일 방문할 수 있다.

위치 합정역 3번 출구 | 문의 02-3141-3337

토이룬

건대 입구에 있는 또 하나의 플레이모빌 가게. 국내의 두 수입처 중 한 곳으로 매장을 연 지 채 1년이 안 됐다. 가게 안을 채운 플레이모빌도 주로 신제품 위주다. 크기 따라 제품 따라 가격도 천차만별이며 국내에서는 보기 힘든 관련 책자도 보유하고 있다. 매일 11시까지 연다.

위치 건대입구역 2번 출구 | 문의 02-467-3817

-- 출처 : 네이버 뉴스(www.nave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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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대전과 성남의 삼성하우젠 K리그 2007 20라운드 경기는 홈팬들에게 두고두고 아쉬울만한 경기였다. 대전은 우승후보로 꼽히는 성남을 상대로 잘 싸우고도 석연치 않은 판정 논란으로 결승골을 내주며 무너졌다. 결승골 이전까지 사실상 대전이 주도권을 잡아나가던 분위기였기에 아쉬움은 클 수밖에 없었다.

자칫 판정 논란 속에 모두 묻힐 뻔했지만, 정작 이날 대전은 불운한 결과 속에서도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다는데 충분히 위안을 삼을만했다. 바로 오랫동안 기다려온 '풍운아' 고종수(29)의 부활을 바로 눈앞에서 확인했기 때문이다.


'앙팡테리블', 대전에서 새로운 축구인생 시작


 
▲ 대전 시티즌의 고종수.
ⓒ 대전 시티즌
 

한때 '앙팡테리블(프랑스어로 무서운 아이)'이라는 닉네임으로 불리던 한 소년이 있었다. 1996년 수원 삼성의 창단 멤버로 처음 이름을 알린 이 작은 체구의 고졸 신인은 일약 팀을 K리그 정상으로 끌어올리며 프로축구계에 '무서운 아이' 신드롬을 일으켰다.


같은 해 비쇼베츠 감독이 이끌던 올림픽대표팀에 최연소로 발탁되어 곧장 주전 플레이메이커 자리를 꿰찼으며, 차범근 성인 대표팀 감독의 눈에 들어 98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지역예선에 합류했으며, 본선에서도 멕시코, 네덜란드, 벨기에와의 조별예선 3경기에 모두 출장하는 등, 엘리트 코스를 거쳤다.


K리그의 르네상스기로 꼽히던 90년대 후반에서 2001년까지는 그야말로 고종수의 전성시대이기도 했다. 당시 포항의 이동국, 부산의 안정환과 더불어 한국축구 '신세대 트로이카'로 꼽히던 3인방은 출중한 실력과 개성, 뛰어난 스타성을 겸비하며 K리그를 대표하는 스타로 자리매김했었다.


그로부터 어느덧 6년의 세월이 흘러 2007년, 고종수가 돌아왔다. 무릎부상으로 2002 월드컵 엔트리에서 탈락한 이후, J리그에서의 실패와 오랜 재활로 인한 후유증, 사생활을 둘러싼 논란과 잦은 돌출행동으로 그는 '문제아'라는 멍에를 쓰며 잊혀졌다. 팬들의 기억 속에 고종수는 더 이상 '앙팡테리블'이 아닌, 어른이 되기를 거부한 피터팬으로 남았다.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무적 선수 신분으로 방황한 지 일 년 반, 고종수는 어느덧 우리 나이로 서른의 문턱에 접어들며 이제는 성숙한 남자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자신을 오늘날 스타로 키워준 옛 은사의 품안에서, 그때 그 소년은 다시 어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김호 감독이 대전의 지휘봉을 잡은 후반기, 8월 1일 부산과의 컵대회 16강전을 통해 복귀 신고식을 가진 고종수는 팀 내에서 꾸준히 '조커'로 출전기회를 잡아가고 있다. 정규리그에서는 지난 12일 포항 전을 시작으로 최근 팀이 소화한 6경기 중 4경기에서 교체멤버로 출전했다.


한 박자 빠른 패스와 넓은 시야, '여전하네'


2일 경기에서 김두현의 선제 골로 성남에 0-1로 끌려가던 후반 5분, 김호 대전 감독은 고종수를 예상보다 빨리 투입했다. 추가시간을 포함하여 이날 약 43분 출장은 고종수가 올 시즌 가장 많은 시간을 소화한 경기였다.


'양뿐 아니라 질'에서도 고종수의 활약은 근래 들어 가장 돋보였다. 투입되자마자 고종수는 후반 10분 페널티 에이리어 오른쪽에서 기습적인 중거리슈팅을 날리며 가벼운 몸놀림을 보여줬다. 경기의 흐름을 파악하고 상대의 타이밍을 빼앗는 고종수 특유의 템포축구가 돋보이는 장면이었다.


체력적으로 아직 부족한 만큼 1대 1 상황에서 날카로운 돌파를 보여준다거나 빈 공간을 파고드는 것처럼 운동량을 필요로 하는 플레이는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나 플레이메이커로서 한 박자 빠른 패스와 넓은 시야를 통해 동료들에게 수차례 공격의 활로를 만들어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 이날 동점골을 넣은 데닐손과 함께 보여준 콤비플레이가 인상적이었다. 개인기와 돌파력이 좋은 데닐손이 활발한 움직임으로 공간을 창출하면 고종수가 한 박자 빠른 패스로 지원하거나 다른 동료들에게 찬스를 만들어주는 식의 플레이가 이날 계속됐다. 후반 대전의 공격은 대부분 고종수-데닐손을 중심으로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종수는 이날 수비에도 의욕을 보였다. 전성기 시절의 고종수는 수비 부담이 많은 역할이 아니었고, 스스로도 수비 가담에 그리 적극적인 선수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날 고종수는 팀 사정상 민첩하지는 못했지만 하프라인을 몇 차례 왕복하며 수비를 지원하고 몸을 날려 공중 볼을 따내는 등 강한 투지를 선보였다. 재기에 대한 선수의 집념을 읽을 수 있었던 대목이다.


아쉽게도 고종수에게 복귀 이후 처음으로 승리의 주역이 될 수도 있었던 이날 경기는, 후반 40분 터진 김동현의 결승골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모두가 인정 할 수 있는 실점이 아니라, 성남의 프리킥이 판정 논란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안타까울 일이다.


고종수는 경기가 끝난 후 굳은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빠져나갔다. K리그 복귀이후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준 하루였음에도 운이 따르지 않았다. 경기의 스포트라이트는 이날 스스로 승부를 결정지어버린(?) 심판의 멋쩍은 모습과, 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에게 달려든 어느 대전 구단 임직원과의 몸싸움, 그 위로 날아오르던 관중들의 '분노의 물병(?)' 속에 가려졌다.


만일 이날 대전이 승리하거나 혹은 비기기만 했더라도 오늘의 주역은 고종수가 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팬들은 고종수를 결코 잊지 않았다. 이날 고종수가 보여준 화려한 부활과 김호가 이끄는 대전의 가능성에 대전 팬들은 환호하며 따뜻한 격려의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오늘 졌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고종수에게도, 대전에게도, 재기는 이제 시작일 뿐이니까.

-- 출처 : 오마이뉴스(www.ohmynews.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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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시작된 SBS 드라마 <왕과 나>.
ⓒ 김종성
 

최근 시작된 SBS 드라마 <왕과 나>에 나타난 내시는 독자적 이해관계를 구축하면서 왕권을 위협하는 이미지를 띠고 있다. 중국에서는 내시 대신 환관이라는 표현이 주로 사용되고 있다.


1, 2회에서는 세조에 이어 새로 즉위한 예종이 집권 초기부터 내시부 개혁에 착수하자, 이에 맞서 판내시부사 조치겸(전광렬 분)이 왕권에 맞서 활로를 모색하는 장면이 방영되었다. 물론 드라마에서 말이다.


<왕과 나>에 전형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은 내시를 '궁중에서 왕권을 위협한 존재'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중국역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환관의 폐해'니 '환관의 농간'이니 하는 표현이 그런 인식을 더욱 더 부채질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내시제도가 본래 어떤 정치적 기획 하에서 출발한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내시가 왕권을 위협했다는 일부의 통념이 그리 근거가 없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사실, 내시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인식은 다분히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형성된 측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시제도가 왕권과 관련하여 어떤 기능을 갖고 있었는가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유용한 사례가 있다. 그것은 바로 오스만제국(1299~1922년)의 궁정노예제도다.


2001년에 이하라 히로시가 짓고 벤세이출판사(일본)가 펴낸 <지식인의 제상>에 실려 있는 스즈키 다다시(도쿄대 동양문화연구소) 교수의 '오스만제국에 있어서 지(知) 및 권력의 담당자와 정치과정의 변용'이라는 논문에는 과거 오스만제국의 왕들이 궁정노예를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오스만 궁정에 있던 노예신분의 남자들은 동아시아의 내시와 '신분적’으로 다를 게 별로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오스만제국의 궁정노예들이 거세를 했는지에 관해서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오스만제국의 궁정노예들이 내시와 같았다는 말은 '신체적'으로 그렇다는 게 아니라, 궁궐에 사는 왕의 남자 노예라는 '신분적' 조건이 같다는 의미다. 


술탄(오스만제국 군주) 전제정치가 확립된 15세기 후반부터 오스만제국의 통치구조에는 특이한 현상이 나타났다. 군주 전제정치가 확립되었으니 술탄이 전면에 나섰을 법한데, 도리어 술탄은 뒤로 물러나고 엉뚱한 제3자가 권력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그 제3자라는 것은 술탄의 절대적 대리인으로서의 영향력을 가진 대재상(국무총리)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대재상들의 대부분이 귀족이나 관료 출신이 아닌 궁정노예 출신이었다는 점이다. 한국이나 중국식으로 표현하면, 내시 혹은 환관들이 국무총리를 맡은 셈이다.


오스만제국의 술탄들이 궁정노예에게 대재상을 맡긴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이는 그만큼 술탄의 권력이 귀족의 권력을 능가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이러한 제도를 통해 술탄들이 자신의 정치적 책임을 절대적 대리인인 대재상에게 떠넘기려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아무런 권력기반이 없는 궁정노예에게 대재상직을 맡김으로써 대재상의 권력이 강화되지 못하도록 하는 동시에, 귀족들의 권력도 견제하고 술탄 자신의 권력도 강화시킬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처럼 전제정치가 확립된 15세기 후반부터 오스만제국의 술탄들은 자신의 측근인 궁정노예들을 권력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귀족들을 견제하는 한편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


 
창경궁 명정전에 있는 보좌. 내시는 보좌를 위협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를 보좌하는 존재였다.
ⓒ 김종성
 

한국과 중국의 내시제도도 유사한 취지를 갖고 있었다.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취지에서 남자 노예들을 궁궐에 두었던 것이다.


전통시대에 군주는 기본적으로 백성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군주는 귀족의 압제로부터 백성을 보호하는 '호민관'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군주가 귀족들과 한패가 되어 백성을 압제한 사례는 잘 발견되지 않는다.


천명사상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동아시아의 군주들은 기본적으로 천(天) 즉 민(民)에게 권력의 정통성을 두고 있었고, 이러한 이념에 따라 동아시아에서는 군주와 귀족 사이에 일종의 이념적인 대립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에 왕권과 재상권 사이에 대립이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백성에게 권력의 정통성을 두었다고는 하지만, 귀족세력과 대립하고 있는 군주는 본래 외롭고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랬을까? 왕실이 있다고는 해도 수적인 면에서 군주는 귀족세력에게 밀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주 편이라 할 수 있는 백성은 멀리 있고 군주의 대립자인 귀족은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백성에게는 별다른 사회적 권력(경제력·군사력·정보력)이 없지만, 귀족에게는 그런 무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백성은 조직화되어 있지 않지만, 귀족은 비교적 조직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군주는 귀족과의 대결에서 고독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군주에게는 또 다른 '힘 있는 남자'들이 필요했다. 그들이 바로 내시이고 환관이었다.


내시를 '힘 있는 남자'라고 하니까, 표현이 좀 어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시들은 정말로 힘 있는 남자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군주의 통치를 보조하는 데에 필요한 여러 가지 기술적 지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군주를 보좌하도록 훈련받은 사람들이었다.


군주의 입장에서 볼 때에, 충성스러운 관료보다는 충직한 내시가 더 믿을 만한 존재였을 것이다. 동아시아 전통시대의 관료들은 대개 귀족이나 사대부 출신의 유교적 지식인들이었다. 그런데 유교 이론은 신권(臣權)보다는 왕권을 제약하는 측면이 더 컸다. 폭군방벌론이 그것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관료가 아무리 충성스러울지라도 그 역시 언제 돌변하여 "폐하, 아니 되옵니다!"를 외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귀족이나 사대부 출신의 관료인 경우, 군주의 정책이 자기 집단의 이익을 침해한다고 판단되면 "금상(今上)에게서는 천명이 떠났다"며 반기를 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에 반해, 내시들은 달랐다. 그들은 신체의 특정 부위만 없는 게 아니라, 군주가 보기에 '더 중요한 그 무엇'도 없었다. 그것은 바로 군주의 권력을 위협할 만한 사회적 권력이었다. 대개 가난하거나 미천한 집에서 태어난 사람들인데다가 어려서부터 군주만 쳐다보면서 살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내시들에게는 군주를 위협할 만한 사회적 무기가 별로 없었다.


또 궁녀와 비교할 때에, 그들은 군주에게 사심을 가질 만한 이유가 별로 없는 사람들이었다. 궁녀들은 군주에게 성적 욕구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궁녀들의 충성심은 남녀관계가 그렇듯이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시들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없었다. 


또 왕실의 남자 구성원들과 비교할 때에도, 내시들은 군주가 신뢰할 만한 존재였다. 왕이 아닌 남자 왕족은 왕의 자리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내시들은 그럴 가능성이 없으므로 왕이 의심할 이유가 별로 없었다.  


그리고 내시들은 군주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을 최고의 가치로 배운 사람들이기 때문에, 군주가 설령 실정을 저지른다 해도 군주를 배반할 가능성이 낮았다. 군주가 귀족의 이익을 침해한다 해도 그렇고 또 설령 군주가 백성의 이익을 침해한다 해도, 내시들은 어디까지나 '왕의 남자'들일 뿐이었다.


바로 이러한 충성스러운 내시들이 있었기에 동아시아 군주들은 귀족이나 사대부와의 대결에서 힘의 균형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그들이 없었다면, 군주가 귀족이나 사대부를 억누르고 애민정책을 펴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애민정책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백성을 위하는 정책인데, 이런 정책을 펴다 보면 자연히 귀족이나 사대부의 이익을 침해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과거에 합격한 관료들이 왕의 정책을 수용할 가능성이 낮아지게 된다.


평소에는 충성스럽던 신하도 막상 자기 집단의 이익을 침해하는 정책이 시행되면 '천명이 떠났다'면서 자신의 변절을 합리화할 가능성이 있다. 이런 경우에 왕이 속마음을 터놓고 '작전'을 의논할 대상은 유능한 내시들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동아시아의 내시는 본질적으로 군주와 귀족의 대결에서 군주의 권력을 보조하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들의 존재는 기본적으로 군주의 애민정책에 긴요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군주나 백성의 입장에서는 내시를 적대시할 이유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

 
구중궁궐 같은 중국의 자금성. 환관(한국의 내시)들은 이곳에서 평생 황제만 바라보면서 살 수밖에 없었다.
ⓒ 김종성
 

"그렇지만, 내시들이 군주를 독살하고 부정부패를 일삼은 사례가 많지 않으냐?"고 질문할지 모른다. 그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내시들이 군주를 독살한 경우에도 그것은 또 다른 '차기 군주'와의 모의 하에 그렇게 한 것이지, 아무런 배경도 없이 그런 짓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그런 경우에도 그들은 기본적으로 '왕의 남자'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귀족이나 사대부 편을 든다면, 그 순간부터 그들은 존재의 의의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존재의의는 귀족이나 사대부와의 대결에서 군주를 보조하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시들이 뇌물을 받고 매관매직을 하는 등 부정부패를 일삼은 사례에 대해서도 좀 더 숙고가 필요하다. 내시가 판치고 다니는 세상은 그만큼 귀족 혹은 사대부가 기죽어 사는 세상이다. 그리고 귀족이나 사대부가 기죽은 시대는 바로 군주의 권력이 왕성한 시기다.


오스만제국의 사례에서 언급한 것처럼, 술탄의 권력이 전성기일 때에 궁정노예들이 전면에 등장했다. 이것은 자신의 수하들을 권력 전면에 내세워도 좋을 만큼 군주의 권력이 강화되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한국이나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내시들이 판치고 다닌다는 것은 그 뒤에 군주의 비호가 있으며, 또 그렇게 해도 될 만큼 군주권력이 강화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군주와 귀족(혹은 사대부)의 대결에서 군주권이 상대적으로 강화되어 군주를 견제할 사회세력이 약화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군주와 귀족이 팽팽하게 대립할 때에, 군주는 백성을 자기편으로 만들려 한다. 하지만, 귀족에 비해 압도적 우위를 점한 상태에서는 굳이 백성에게 기대려 하지 않는다. 그런 경우에 군주는 자신의 비대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불법자금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군주가 직접 나서서 부정한 돈을 거둘 수 없으니, 그 수하들인 내시가 나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시들이 부정부패를 일삼고 권력을 전횡하는 상황은, 실제로는 군주가 그 배후에 있었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아무 배경도 없는 내시들이 군주와 귀족 양편을 동시에 억압하고 그 같은 부정부패를 일삼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어느 한 쪽이 내시를 비호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귀족들은 내시를 비호하지 않으니, 군주가 그 배후에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내시들이 부정부패를 저질렀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문자 그대로 믿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귀족 관료나 사대부 관료와 달리 내시들은 본래 재산을 축적할 이유가 별로 없는 사람들이다. 인간의 욕심은 대개 성욕이나 가족 때문에 생기는 것인데, 그런 것이 없는 사람들이 불법 재물을 얻기 위해 정치적 모험을 감행했으리라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물론 내시들마다 개인차는 있었겠지만, 그들은 기본적으로 큰 욕심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군주가 그들을 기용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치적으로 볼 때에 내시의 부정부패는 분명 왕의 부정부패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에는 내시의 부정부패라고 기록되어 있다면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될 수 있을 것이다.


오스만제국의 술탄들이 궁정노예를 대재상으로 내세운 이유 중의 한 가지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신의 정치적 책임을 노예에게 떠넘기기 위해서다. 대통령제 국가인 한국에서 총리라는 '이상한 제도'를 두고 있는 데에도 유사한 이유가 작용하고 있다. 헌법학자들의 지적처럼, 총리를 '방탄용'으로 쓰려는 목적이 부분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내시들이 직접 나서서 불법 재물을 모으는 것은, 대개의 경우 군주의 비호나 지시 하에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군주가 비밀 정치자금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에 내시들이 나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경우 내시들이 주범이라고 역사에 쓰여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보스를 위해 정치자금을 수집한 보스들이 검사 앞에서 자신의 단독 범행이라고 우기는 경우와 별로 다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내시들에게 불리한 기록이 역사에 남는 것은 그들의 신체조건으로 볼 때에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역사에 긍정적으로 기술되려면, 후손들의 지위가 든든해야 한다. 군주나 귀족들에게는 그런 후손들이 있다.


하지만, 내시들에게는 양자 외에는 후손들이 없다. 훗날 자기 조상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역사 기록을 정정해달라고 요구할 후손들이 그들에게는 없는 것이다. 내시가 역사에서 부정적 이미지로 남는 데에는 이처럼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또한 내시를 비호해줄 지식인 같은 사회세력이 없기 때문에 역사에는 그들에게 불리한 기록이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어쩌면 역설적으로 그들의 청렴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해서 자기편을 만들지 않았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해서 내시들은 정말로 불쌍한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남자 구실을 못해서가 아니다. 평생 군주에게 충성하면서도 때로는 군주의 잘못까지 대신 뒤집어쓰고 그것도 모자라서 두고두고 역사에서 '나쁜 놈'으로 기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내시는 본질적으로 군주의 정치권력에 보탬이 되는 존재였는데도 오늘날에는 왕을 위협하던 존재로까지 묘사되고 있으니, 그들은 어디 가서 이 억울함을 호소해야 할까? 그들의 후손을 남길 단서는 '항아리'에 들어가고 없으니, 어느 누가 나서서 그들의 한을 풀어줄까?

-- 출처 : 오마이뉴스(www.ohmynews.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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