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 방법대로 Vista + VB6 개발 환경에서 컴파일 하고 실행해보니 에러가 발생하더군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렇게 컴파일된 실행 파일은 Vista 뿐만 아니라 XP에서 실행시켜도 에러가 발생합니다.

Vista + VB6 + RC.EXE + VB 리소스 편집기 ... 뭔가 문제가 있는 듯 한데 추가적인 테스트는 시간 관계상 다음으로 미룹니다. ^^



▣ 이 글에서는 Vista + VB6 개발 환경에서 위 에러를 피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설명합니다.

[1] manifest 정보를 별도 파일로 관리.
manifest 정보는 실행 파일에 리소스로 포함시키지 않더라도 다음의 명명 규칙에 따라 실행 파일과 같은 폴더에 텍스트 파일로 넣어두기만해도 적용됩니다.

실행 파일(확장자 포함)명 + ".manifest"

예를들어 실행 파일명이 vb_amdin.exe인 경우 vb_admin.exe.manifest 이름으로 저장하면 됩니다.

요즘들어 Vista와 호환되는 유틸리티가 배포되고 있는데 일부 프로그램에서는 위 방법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Ex. Total Commander 7)


[2] VB2005의 mt.exe 사용
이전 글에서 mt.exe를 이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언급했었는데, 이 방법을 이용하는 경우에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mt -manifest app_name.exe.manifest -outputresource:app_name.exe;#1

manifest 정보를 리소스로 포함시켜서 배포하겠다면 이 방법을 이용하면 됩니다.


▷ 개발 및 테스트하는 경우, 컴파일 할 때마다 매번 mt.exe를 실행하는 것은 귀찮은 작업이 될테니 컴파일하는 폴더에 manifest 파일을 저장해두면 좀 더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을겁니다.


(간단한 예제 소스와 함께 mt.exe 실행 파일이 있습니다.)


▣ 첨부파일 설명
    ▷ 압축을 풀면 루트에 프로젝트 소스와 함께 Manifest, mt 2개의 폴더가 있습니다.
    ▷ Manifest
        - Vista에서 열어보면 방패 표시가 있는데, 이것은 같은 폴더에 있는 manifest 파일 때문입니다.
        - manifest 파일을 삭제하고 실행하면 일반 사용자 권한으로 실행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mt
        - Vista에서 열어보면 방패 표시가 있는데, 이것은 mt.exe를 이용해서 minifest 정보를 포함했기 때문입니다.
        - manifest 파일을 삭제하고 실행하더라도 Admin 권한으로 실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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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다할아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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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ta에서는 UAC(User Account Control, 사용자 계정 관리) 기능을 통해 프로그램 실행에 대한 권한을 강화했는데, 일반 사용자 권한으로 실행되는 프로그램에서는 시스템 폴더, Program Files 폴더, 레지스트리 제어 등에 있어 많은 제약이 따르게된다.

UAC 기능을 고려하지 않은 프로그램을 Admin 권한으로 실행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Vista 제어판을 통해 UAC 기능을 중지 시킨다. (비추)
        - UAC 기능이 불편함을 초래할 수는 있으나, 사용자 모르게 임의로 실행되는 악성
          프로그램 등으로부터 보호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가급적 사용을 권장한다.
    2. 실행 파일에서 오른쪽 버튼 클릭 후 "관리자 권한으로 실행" 메뉴 선택
        - 경우에 따라 Admin 권한을 부여하기 위한 일회성 방법이다.
        - "사용자 계정 컨트롤"의 권한 상승 화면을 거쳐야 한다.
    3. 실행 파일의 속성->호환성 탭에서 "관리자 권한으로 이 프로그램 실행" 체크
        - 속성 변경 후에는 자동으로 Admin 권한으로 실행된다.
        - "사용자 계정 컨트롤"의 권한 상승 화면을 거쳐야 한다.
        - 파일명을 변경하거나 위치(폴더)를 이동하는 경우, "권한 수준" 내용을 초기화 된다.

 
Vista에서 Admin 권한으로 실행되는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서는 manifest 파일을 리소스에 포함시키면 되는데 VB6의 리소스 편집기에서는 manifest 리소스 관리를 지원하지 않으므로 [1]VS6의 rc.exe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리소스 파일을 만들고 이 리소스 파일을 포함해서 컴파일한다. 또는 [2]VS2005의 mt.exe를 이용해서 이미 컴파일 된 프로그램에 manifest 정보를 추가한다.

[1] manifest 리소스 정보를 포함해서 컴파일하는 방법

1) manifest 파일 만들기
    - 다음의 내용을 텍스트 파일로 저장한다. (파일명 : "app_name.exe.manifest")
<?xml version="1.0" encoding="UTF-8" standalone="yes"?>
<assembly xmlns="urn:schemas-microsoft-com:asm.v1" manifestVersion="1.0">
  <assemblyIdentity version="1.0.0.0"
     processorArchitecture="X86"
     name="AdminApp"
     type="win32"/>

  <description>Description of your application</description>
  <!-- Identify the application security requirements. -->
  <trustInfo xmlns="urn:schemas-microsoft-com:asm.v3">
    <security>
      <requestedPrivileges>
        <requestedExecutionLevel
          level="requireAdministrator"
          uiAccess="false"/>

        </requestedPrivileges>
       </security>
  </trustInfo>
</assembly>


2) ResourceScript 파일 만들기
    - 다음의 내용을 텍스트 파일로 저장한다. (파일명 : ResourceScript.rc)
#define CREATEPROCESS_MANIFEST_RESOURCE_ID 1
#define RT_MANIFEST                     24
CREATEPROCESS_MANIFEST_RESOURCE_ID   RT_MANIFEST    "app_name.exe.manifest"


3) rc.exe 를 이용한 리소스 파일 만들기
    - 도스창에서 다음의 명령을 입력해서 리소스 파일을 만든다.
    - "c:\Program Files\Microsoft Visual Studio\Common\MSDev98\Bin\" 폴더에 있다.
"RC.EXE" /r /fo app_name.res ResourceScript.rc


4) VB 프로젝트에 리소스 파일 추가
   - VB에서 프로젝트->파일 추가 메뉴를 통해 3)에서 만든 리소스 파일(app_name.res)을 프로젝트 리소스 파일로 등록한다.

5) 프로젝트 컴파일

6) Vista의 UAC 사용 환경에서 테스트


[2] VS 2005의 mt.exe를 이용하는 방법

1) Admin 권한 부여를 위한 프로그램(EXE) 준비

2) manifest 파일 만들기 ([1]과 동일)

3) 실행 파일에 manifest 정보 추가하기

mt -manifest app_name.exe.manifest -outputresource:app_name.exe;#1


4) Vista의 UAC 사용 환경에서 테스트


※ manifest 적용 후에는 다음 그림처럼 방패 모양이 추가되는 것을 볼 수 있다. (Vista에서 확인 가능)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 manifest 적용 및 테스트를 위한 예제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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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다할아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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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에서 시니컬한 홍국영으로 분한 한상진.
ⓒ MBC

"자네 같은 사람이 겨우 그만한 노력으로 무과에 입격할 수 있는 줄 아는가? 무과에 입격하려면 뼈를 깎는 노력을 다해 (중략) 피나는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


대수(이종수) 고개가 떨어지려는데, 단기속성 과외방

선생 나으리가 말했다.


"그건 다……. 개소리네."


깜짝 놀라 쳐다보는 대수에게 선생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을 보탰다.


"병법이란 어차피 상대를 속이는 거라고 손자도 하지 않았나? 어디 적당히 속이고 눙쳐서 입격할 방도를 찾게."


대수는 황당했다. 양반이 어찌 그리 말하냐 따지자 그 양반이 또 말했다.


"양반이니 그렇지. 나라에서 제일 속임수에 능한 게 누군가? 바로 나 같은 도포짜리들이네."


홍국영은 그렇게 등장했다. MBC 드라마 <이산>에서 뭇사람들을 속이고 눙쳐서, 위태한 세손 저하(이서진) 임금 만들기에 맹활약중인 홍국영 아니 한상진을 지난 10일 경기도 용인 근처에서 만났다. 갓 벗고 수염 떼고 도포자락 벗은 그는 딴 사람 같았다. 책사 홍국영보다 신수 훤한 펀드매니저로 보였다. <하얀 거탑>에서 장준혁을 보필하던 ‘깍두기’ 머리 의국장도 아니었다.


홍국영, 다른 사극과 다르게 다르게


"홍국영이란 역할이야. 노력을 많이 해야 해. 부족하니까 열심히 해야 하고."


이병훈 감독이 말했다. 지난 6월이었다. 그는 아무도 몰래 홍국영에 뽑혔다. 처음엔 본인도 몰랐다. 김근홍 감독, 이병훈 감독, 그리고 주요 제작진까지 3차 관문을 통과한 결과였다. 살아온 이야기도 했고, <대장금> <허준>의 주인공 남자 역할도 해보인 결과였다.


배우 생활 7년째지만, 아직 무명인 그에겐 파격이었다. 어쩌면 '발탁'이었다. 홍국영이 누군가? 세손 편에 서서, 오르내리는 극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책사'였다. 그는 무술을 배우고 승마를 배웠다. 영조와 정조시대 책을 읽었다. 홍국영에 대한 만화책도 봤다. 하지만 이전에 홍국영을 그린 드라마는 보지 않았다. 이병훈 감독 엄명이었다.


"홍국영이 나온 드라마, 절대 보지 마라. 그거 답습해서 비스무리하게 만들거나 하지 마라. 네 것을 해라."


드디어 대본 연습 시간이 돌아왔다. 10회였다. 홍국영이 첫 등장하는 신이었다. 그리고 '무지 잘했다'가 아니었다. 무지막지하게 혼이 났다.


"대본 딱 들어갔는데, 한 줄을 못 넘기는 거예요. 한 단어 읽으면 감독님이 '그게 아니지.' 아냐. 그게 아냐. (말투가?) 네. 말투가. 시니컬해야 하는데 전 너무 사극처럼 만들어왔던 거죠. 누군가를 따라하는 느낌이 막 드신데요. 왜 그렇게 만들어왔냐고, 네 것 하라고, 네 평소하던 대로 해봐!"


대본 연습이 끝나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떨렸다. 하지만 배에 힘을 주고 일어났다. 그는 생각했다.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돼.


홍국영은 어려운 말도 유창하게 좔좔좔 읊어야 했다. 홍국영은 똑똑한 사람, 천재였으니까. 그렇다고 감정 없이 줄줄 읊어서도 안 됐다. 템포를 살려야 했다. 그걸 찾아야 했다. 너무 힘들지만 찾아야 했다. 대본을 정말 많이 봐야 했다. 봐도 봐도 부족했다. 해도 해도 혼이 났다. 발음 때문에, 너무 느려서, 너무 빨라서……. 힘들었다. 대본만 나오면 입에 펜을 물고 대사를 연습했다. 또 감독은 그에게 전체를 보라고 했다. 그러다 슬슬 코드가 맞아가는 게 보였다. 많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하얀 거탑> 할 때는 수술도구까지 다 외웠어요. 수술실 들어가서 막 공부하고요. 똑같이 해야 된다구……. 감독님이, '야. 너네, 의사야. 한상진이 아니라 이제 의사가 된 거야. 의사들이 봤을 때 니네가 진짜 의사 같아야 우리 대화가 진짜 대화가 되는 거지. 안 그럼 우리 것은 흉내 내기야.'


가끔 저도……. 이럴 때도 있죠. '내가 왜?' 그런데 방송 나오는 거 보니, 딱 알겠더라구요. 감독님 생각이 맞았구나. 내가 착오가 있었구나. 아! 시니컬하게 표현하란 게 저런 거구나."


 
<이산>에서 홍국영으로 활약하는 한상진.
ⓒ 오마이뉴스 김정훈

유시민에게서 홍국영의 향기가?


실제 <이산>에서 홍국영이 튀는 이유가 그랬다. 홍국영의 시니컬함, '냉소'는 빛났다. 홍국영은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거침없이 말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후겸 앞에서도 "개를 따라다니면 측간을 가고, 범을 따라다니면 숲을 얻기 마련"이란 소릴 천연덕스럽게 내뱉었다. 사극 인물 같지 않았다. 말투도 그랬다.


"제가 홍인한 대감을 찾아가서 그러잖아요. '아. 제가 좀 기다려야 되겠네요.' '무슨 날을 기다린단 말인가?' '대감께서 돌아가실 날 말입니다.' 이것도 전 처음에 심각하게 했더니, 감독님이 '아니야. 홍국영은 이런 말도 굉장히 시니컬하고 무표정하게 할 거야. 걘, 간이 배 밖으로 나왔거든.'


홍인한이 정1품 대감이고, 홍국영은 정7품인데, 지금 7급 공무원이 1급 장관한테 가서 '나 안 키워주면, 당신 죽는 날까지 기다리고 볼 거야.' 이러는 거잖아요. 홍국영은 굉장히 시니컬하면서 사회 비판적이지만, 기회를 노리며 탁 숙이고 있다가 언젠가 기회가 오면 기회를 잡으러 들어가는 인물인 거죠."


김근홍 감독이, 이병훈 감독이 그에게 말했다. 대수랑 이야기할 때도, 시니컬한 사람이 그렇게 얘기할까? 그렇게 헤헤 웃을까? 왜 자꾸 뭔가를 만들고 다른 사극처럼 똑같이 가려고 하냐? 네 캐릭터를 버리지 마라. 화학조미료 같은 걸 자꾸 넣으려 마라. 원래 만든 대로 해라. 너무 많은 걸 하려고 하지마라.


그런데 이렇게 시니컬한 사람, 혹시 롤모델이? 혹시 참고한 사람이 없었나? 물론 흔하진 않았겠지만.


"유시민…….(웃음) 김근홍 감독님이 시니컬한 사람으로 최고라고…….(웃음) 그런 거 같기도 해요. 그분은 도무지 속을 모르겠어요. '돌발영상' 봐도 그렇고, 기사를 봐도 그렇고. 그분이 어쩌면 홍국영 같기도 해요. 돈키호테 같기도 하고.


옛날 영상, 봤어요? 유시민 의원이 처음 국회의원 됐을 때, 정장 안 입고 국회에 들어간 거 있잖아요? 그 장면이 너무 시니컬한 거예요. 일단 딱 올라가, 사과하고……. 다른 국회의원들이 뭘 막 던지고 그러는데 그 분, 진지하시더라고요. 그 장면이 너무 웃긴 거예요. 어우! 그 시니컬함! 홍국영이 아마 조선시대가 아니라 현대라면 저렇게도 될 수 있겠다."


내가 원래 시니컬하고 많이 비판적인 사람


그런데 그는 어쩌다 배우가 됐을까? 어려서 그의 집안은 극과 극이었다. 받아쓰기 시키고 영어 시키던 친가와 달리 외가에 가면 노래하고 밤새도록 노는 분위기였다. 알려진 대로 현미가 그의 이모고 노사연이 사촌 누나인 집안이니, 어쩌면 당연했다. 가족들이 모두 TV에 나오는 분위기였다. 어린 그도 막연히 TV에 나오고 싶었다.


 
<하얀거탑>에 이어 <이산> 홍국영을 연기하는 한상진.
ⓒ 오마이뉴스 김정훈

"현미 이모는 지금도 그래요. 넌 끼가 없고 네가 연기하는 거 보면 신기해. 지금도 집안에서 어른들이 노래시키면 못해요. (진짜?) 정말 못해요. 그러니까 제가 연극무대 섰을 때 현미 이모가 보시고 기립 박수를 쳤어요. <오셀로> 할 때 오셨는데, 기립 박수 치고 우셨대요. 너무 감동해서……. 야. 저 놈이……."


대학 방송연예과 졸업 직전, 시험에 붙었다. 아니 뽑혔다. SBS 톱 탤런트 대회였다. 지금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같은 대회였다. 경쟁률이 3천 대 1이었다. 드라마에 고정 출연했다. 배역에 이름도 있었다. 금방 주인공이 될 줄 알았다.


"그땐 약간 교만했죠. 전 연기를 잘 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정작 주어지니까 연기를 못하더라구요." 그가 시니컬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회가 왔는데 못 잡으니까 도태되는 거예요."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 <청혼>을 찍었다. 중간에 연극도 했다. 들어오지 않는 배역을 마냥 기다리며 놀 순 없었다. <리어왕> <오셀로>……. 오셀로를 하느라, 20kg을 찌웠다. 그래도 연극이 좋았다. 정말 좋았다. 무대 하나가 끝날 때마다 관객들 에너지가 쑤욱 들어왔다. 공연 끝나면 선배들과 이야기도 많이 했다. 그때였다. 소개팅을 했고,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농구 선수 박정은이었다. "한 분야에 최고를 이룬 사람"이었다. 그리고 2004년에 결혼했다.


아내는 지금 합숙중이다. 얼굴 보기 힘들다. 아무리 국가대표급 농구선수지만, 그도 아내가 집에서 기다렸다가 따뜻한 밥을 해주길 원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 안 했을까? 그가 딱 잘라 말했다.


"결혼할 때 그걸 알고 결혼했잖아요. 처음에 저도 그런 거 때문에 투정을 부리고 그랬는데, 누가 그러더라구요. 박정은이란 사람은 한상진의 아내일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박정은이다. 태극마크는 아무나 다냐? 넌 연기하면서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지 못 하잖냐? 어우. 욱 하더라구요. 그럼 나도 양복에 태극기 마크 달겠다. 그런 게 어딨냐. 그런데 태극마크를 단다는 것, 어느 한 분야에 베테랑인 거 쉽지 않잖아요. 그런 데 있어선 대를 위해 소가 희생하는 거죠."


다 접고 갔던 미국, <하얀 거탑>으로 돌아오다


지난 해, 그에게도 회의가 찾아왔다. <백만장자와 결혼하기>가 끝난 뒤였다. 할 일은 없고, 답답했다. 그리고 막막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미국에 가자. 한 3, 4년 공부라도 해보자. 눌러앉을지도 몰랐다. 미국에 갔다. 그때였다. 미국으로 전화가 왔다. <하얀 거탑> 오디션을 알리는 전화였다. 가슴이 쿵 했다. 제일 빠른 비행기를 탔다.


"안판석 감독님께 물어봤어요. 왜 저를 뽑으셨어요? 강렬했대요. 제가 인상이. 머리가 그때 빡빡이었거든요. 또 오디션에서, 제가 제일 잘 했대요. 말도 조리 있게 잘했고……. 연기란 그런 거 같아요. 스타니슬라브스키 연기론이, 연기는 삶이다. 연기는 곧 인생이다. 인생은 연기고. 그런 것처럼 살아온 환경을 보면 그 사람 연기가 보인대요. 대사를 아무리 몇 백 번 읽어도, 살아온 환경과 말투를 보면 알 수 있대요."


그는 자신이 시니컬하고 많이 비판적인 사람이라고 했다. 데뷔한 지 시간이 좀 지나고, 그래도 자기 위치를 못 잡아 마음속에 스며든 서러움 같은 게 있다고 했다. 응어리? 한? 자괴감, 아픔도 있다고 했다. 그는 농담처럼 자신이 7년간 '집안 탤런트'였다고 말했다. 집안 사람들만 아는 탤런트. 그리고 생각했다. 그런 아픔들이 모아지면, 좀 더 좋은 연기가 나오지 않을까? 잘 이용하면?


그래서였을까? <하얀 거탑>에서 그가 왠지 눈에 띈 게? <하얀 거탑> 때, 그는 아예 이천 세트장에서 살았다. 먹고 자고, 진짜 의국장처럼 살았다. 숙직실에서 누워있다, '와라' 그러면 뛰어가 머리가 눌린 채로 촬영했다. 원래 의사가 그러니까. 행복했다. 많은 걸 배웠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나? <하얀 거탑> 안판석 감독은 칭찬을 잘 했다. 칭찬은 그를 춤추게 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나눠줄 줄 아는 배우들을 만났다. 드라마는 혼자 잘 하는 게 아니라, 함께 잘해야 한다는 걸 그때 배웠다. 또 김명민은 그에게 '연기'를 알려줬다. (연기를) 넘치게 하지마라. 모자란 게 좋은 거다.


"그제 명민이 형이 전화해 그러더라구요. (촥 가라앉은 말투로) 국영아……. 네가 활약이 크구나. 형이 잠깐 영화를 할 때……. (웃음)"


 
<이산> 홍국영을 맡은 한상진. 그는 전에 <하얀거탑> 의국장이었다.
ⓒ 오마이뉴스 김정훈

다른 생각? 다음 생각? 그럴 겨를이 없다. <이산>은 60부작이다. 갈 길이 멀었다. 아직 반도 가지 않았다. 파란만장 홍국영? 멀었다.


"다른 걸 생각할 수가 없어요. 홍국영 역에 올인 해야 하구요. 확실하게 소화를 해서, 시청자들도 이해할 수 있고 동정할 수 있고 그런 홍국영을 만드는 게 저한테 가장 큰 급선무고요. 그 다음에 이거 올인 하고 났을 때, 나중에 올 허탈감을 줄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하얀 거탑>의 옛날 주인공 배우는 드라마가 끝나자마자 그 다음날 자살했거든요. 진짜로! 명민이형도 그랬어요. <하얀 거탑> 끝났는데 그날 밤에 자살충동을 느꼈다구요. 너무 몰입해서요. 드라마에서 자기 배역이 죽으면 아주 우울해요. 저도 그럴 거 같아서…….


그런데 그래야지 정상인 거 같아요. 저를 믿고 선택해준 분들 위해서라도 그 정도는 해야죠. 저를 믿고 의지하는 제 가족들...  (숨을 내쉬며) 하아. 어깨가 무겁죠. 그러니까 허튼 생각을 할 수 없어요. 저한텐 목이 칼에 딱 요기 이렇게 와있어요.”


서른 살! 그는 두려움을 딛고 잔치를 여는 중이었다.

-- 출처 : 오마이뉴스(www.ohmynews.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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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다할아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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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태양이 나를 향해 눈부신 빛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빛은 수십 개로 늘어났다. 반짝이고 뜨거운 빛에 의해, 시야가 가려지고 몸이 서서히 메말라 가는 동안에도 나는 그 빛에 취해 있었다. 빛이 영원토록 내게만 비출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계속 그 빛을 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시야에서 빛이 사라졌다. 그런데 눈을 뜰 수가 없다. 내 앞에 있던 빛을 너무 오랫동안 봤기 때문일까? 결국, 눈이 멀고 내 몸은 완전히 말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다 예전에 비췄던 빛 중 유일하게 구분할 수 있었던 하얀빛이 보였다. 눈도 서서히 보였다. 옆과 뒤도 보였다. 빛을 처음 봤던 그때로 돌아간 것이다. 다시는 수많은 빛에 취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나는 한때 내 왼발로 모든 빛을 모이게 했던 고종수(29·대전 시티즌)다.


 
올 시즌 대전에서 부활한 '앙팡테리블' 고종수.
ⓒ 대전 시티즌

 

[#1. '축구천재'의 부활?] "말로 하면 뭐해요. 운동장에서 보여주면 되지"


지난 7일 오후 대전지하철 지족역 근처 한 커피전문점. 인터뷰를 위해 가게에 들어서자 막 나가려던 여성 손님이 그를 알아보고는 "고종수 잘 생겼다. 열심히 해요"라고 한마디 한다. 어색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좋은 말을 들어서 그런지 얼굴에는 미소가 번진다.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종업원의 주문 요청이 들어왔다. 그는 "달달한 것 없나요?"라고 묻더니 블랙커피를 시켰다. "설탕을 꼭 가져다 달라"는 주문과 함께.


문득 몸 관리라면 철저하다는 그의 선배 서정원이 생각났다. 서정원은 지난 7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 관련기사 바로가기)에서 '아이스 녹차'를 시켰었다. 그래서 물었다. '커피 마셔도 되냐'고. 그러자 별 걱정을 다 한다는 듯 한마디 던진다.


"TV에서 보니 하루에 커피 한 잔은 괜찮다고 하던데요.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영양학 교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고요. 커피 한 잔 정도야 별 지장 없을 것 같아요."


 
지난 7일 만난 대전의 고종수 선수.
ⓒ 이성필

그렇게 커피를 마주하고 이야기가 시작됐다.


올 시즌 고종수는 대전에 전격 입단했다. 그가 재기할 것이라 예측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공백 기간이 너무 길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서히 출전 시간이 늘어나고, 득점까지 하면서 고종수는 언론노출 빈도도 높아졌다. 게다가 그의 스승 김호(63) 감독이 대전을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는 기적을 보여주면서 그와 대전에 대한 축구팬들과 언론의 관심은 폭발적이었다.


"인터뷰를 자제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쉽지가 않더라고요. 구단에서도 그런 점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하는 것 같았고요. 그래도 팬들이 궁금한 점을 풀어줘야 한다고 생각해서 여러 인터뷰에 응했어요."


그와 인터뷰를 끝낸 뒤 대전의 연습경기가 열린 월드컵 보조구장에서 만난 구단 직원은 여전히 밀려들어 오는 인터뷰 요청을 조절하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에이전트인 AI스포츠 곽희대 대표 역시 마찬가지였다. 같은 질문에 같은 말을 반복해야 하는 어려움 때문인지 그는 더 이상 언론의 인터뷰 요청을 응하기 힘들다며 다음과 같은 말로 정리했다.


"(축구를) 잘 하지도 못하는데 말로 하면 뭐해요. 운동장에서 보여주면 되지. 운동선수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하면 될 것 같아요."


[#2. 수원과 그랑블루]  "겉으론 욕해도 마음 속으론 응원하지 않을까요?"


 
대전에서 다시 만난 김호 감독(왼쪽)과 고종수(오른쪽).
ⓒ 대전 시티즌

K리그에 첫 발을 내딛게 해준 수원 삼성 블루윙즈은 그와 뗄 수 없는 사이다. 1996년 만 열여덟의 어린 나이에 창단 멤버로 두 번의 정규리그 우승과 아시아 클럽 정상을 같이 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대표로 인연을 맺었던 차범근 감독과 2004년에도 만났다. 수원 서포터 '그랑블루' 역시 그와 같이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솔직히 수원 팬들은 늘 마음 구석에 자리하고 있어요. 종합운동장(수원월드컵경기장이 생기기 전 수원 홈 구장) 시절부터 같이 커왔잖아요. 지난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 때 반대쪽에서 그들(그랑블루)을 보게 됐는데 여전히 대단하고 멋있더군요."


그랬다. 지난 10월 14일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대전은 수원을 만나 1-0의 승리를 거뒀다. 경기 후 김호 감독과 고종수는 수원 팬들이 자리한 남쪽 관중석 앞으로 이동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이들에게 박수를 쳐주는 팬들도 있었고 야유를 보내는 팬들도 있었다.


"몇몇 팬들은 겉으로는 저한테 욕하고 그러시는 것 같던데 마음 속으로는 응원해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다고 제가 잘 보일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이제는 대전 팬들이 열렬히 응원해 주잖아요."


어느새 대전의 '자줏빛 전사'가 다 됐다. 여러 인터뷰에서도 대전 팬들의 열정을 높이 치켜세웠다. 대신 그는 한 가지 바람을 얘기했다.


"그랑블루 같은 서포터가 팀마다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면 선수들도 경기할 맛이 날 텐데요. 한쪽은 온통 빨갛고 다른 쪽은 새파랗고,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요."


2004년 J리그(교토 퍼플상가)에서 돌아와 FC서울과 입단 계약 직전까지 갔던 고종수는 수원으로 다시 돌아왔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팬들의 성원과 그리움이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팀 무단이탈과 음주 등으로 물의를 일으켰고 차범근 감독과의 사이도 벌어졌다는 소문까지 터져 나왔다. 결국, 구단은 그를 임의탈퇴 시켰다. 이때부터 그의 방황은 시작됐다.


"그때는 제가 정신이 나갔었나 봐요. 힘든 시기였고 모든 게 틀어진 것 같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전적으로 다 제 잘못이죠. 생각이 너무 짧았어요. 차 감독님과 안 맞는 것은 아니었어요. 단지 감독님의 선진적인 축구 사상을 제가 부족해서 못 따라간 것뿐이죠."


[#3. 지독한 부상] "신이 있다면 내가 뭘 잘못 했는지 묻고 싶어요"


 
고종수 선수의 미니홈피.
ⓒ 인터넷 화면 캡처

어느새 서른 문턱까지 다다른 고종수, 그의 개인 홈페이지에는 여러 가지 문구가 새겨져 있다. 그중에도 '사자는 아무리 배고파도 풀은 뜯지 않는다'는 상당히 인상적인 문구다. 자신을 사자에 이입시킨 것 같은 느낌의 문구에 대해 그는 "비굴하게 살지 않는 게 자신의 신조"라고 강조했다.


또 다른 문구도 있다. '실패라는 상처 위에 인내라는 약을 발라 노력이란 붕대를 감는다면 성공이라는 흉터가 남는다'라는 것이다. 지인이 어느 날 힘내라며 보낸 문구를 보고 난 뒤 '정말 내 인생 같다'는 느낌이 들어 늘 새겨놓고 있다고 한다.


"인생이란 게 그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잘할 때 연락하던 주변 사람들이 헤매고 있으니 알아서 연락을 안 하더군요. 요즘에서야 가끔 연락이 오는데 그러더라고요. '연락하려니 마음이 안 좋아서 그랬다'고들 하던데 뭐 괜찮아요. 이제 '축구천재'가 아닌 묵묵히 운동해서 기억에 남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2001년 8월, 수원 시절의 고종수는 전남 드래곤즈와의 경기에서 오른 무릎 전방십자인대 파열이라는 큰 부상을 겪었다. 물론 그 이후로 다시 경기에 나서 재기에 힘썼지만 부상이 다시 재발하는 불운을 겪었다.


그는 무릎의 수술 자국을 보여줬다. 손으로 만지니 무릎 아래쪽이 움푹 들어갔다. 수술만 여섯 번을 했다는 그는 그곳을 가리키며 '인대가 없다'고 표현했다. 수 없이 재발한 부상의 생채기였던 것이다.


"하루에 운동을 네 번씩 했어요. 매일 야채만 먹으면서 죽어라 재활에 매달렸어요. 저 재활치료사 해도 될 걸요. 그런데 또 아프고 그러니깐 정말 왜 나한테 이런 시련이 오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종교를 가지지 않았지만 만약 신이 있다면 내가 뭘 잘못 했는지 묻고 싶어요."


[#4. 휴식, 혹은 외도] "무릎팍 도사에 나가면 할 말 많을 걸요"


드라마 같은 시즌이 종료된 지금 그는 팀의 마무리 훈련을 끝낸 뒤 병원을 오가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오른쪽 골반 부위가 조금 아프다고 한다. 이에 대해 김호 감독은 '피로가 쌓여서 오는 증세'라며 휴식을 확실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귀곡 산장' 같은 구단숙소에서 '24시간 뉴스 채널'과 '몇몇 드라마'를 보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고 한다. 낙후된 대전의 숙소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것밖에 없을 것이다. 혹은 근처 군부대의 나팔소리와 군가로 하루의 시작과 마무리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무료할 법도 하다. 과거 잘 나가던 시절 그는 연예 프로그램 종종 등장했다. 최근 인터넷에는 그가 출연했던 시트콤, 뮤직 비디오 동영상이 돌아다닌다. 혹시 방송국에서 불러주면 다시 나갈 생각은 있을까?


"일 년 내내 운동하고 나면 지쳐요. 공부하는 사람이 매일 공부만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다른 경험을 해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에요."


이쯤 되면 '고종수 아직도 정신 못 차렸다'는 비판의 소리가 들릴 만하다. '노는 기질'을 버리지 못했느냐며 반성하라는 이야기도 나올 것이다.


"물론 운동에 지장을 주면 안 되죠. 시즌 종료 후 휴식기간 동안에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운동장에서 거친 부분만 보여주다가 새로운 것을 보여주는 것도 일종의 팬 서비스 아닐까요? 팬들이 그런 부분을 알아주면 좋겠어요."


최근 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즈의 타자 양준혁(38)은, MBC 예능 프로그램인 <황금어장>의 '무릎팍 도사'에 출연하기로 했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뭐든지 팬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선수들이 먼저 다가가야 한다. 훈련에 지장을 받지 않는다면 비시즌 때 개그 프로그램에도 출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양준혁의 발언은 고종수의 생각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넌지시 그에게 물었다. 무릎팍 도사에 출연해 '자신의 고민 상담'과 동시에 '대전'과 '축구'를 홍보해 볼 생각은 없느냐고.


"만약 무릎팍 도사에 나간다면 할 말 많을 거예요. 제 인생이 완전 인간극장 따로 없잖아요. 영화로 찍어도 될 걸요."


 
지난 7일 대전에서 만난 고종수 선수.
ⓒ 이성필

 

[#5. 인생의 동반자] "팬들과 통닭에 생맥주 한잔 했으면..."


그는 요즘 부모님의 건강이 걱정이다. 한 분이라도 괜찮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않아 더욱 그렇다.


"수원과의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 때 관중석에서 보셨대요. 몸이 아파서 힘드신데도 오셨더라고요. 이기니깐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제가 재기하고 우리팀(대전)이 6강까지 오르는 모습을 보며 부모님께서 용기를 많이 얻으신 것 같아요."


부모님과 더불어 그에게는 감사하고 함께 가야 할 대상이 있다. 바로 자신을 묵묵히 응원하던 팬들이다. 수원에서 전남으로 다시 대전에 오기까지 이들은 한결같이 그의 부활을 기원했다. 경기장에는 그의 출전 여부와 상관없이 '왼발로 통한다! 고종수' 혹은 '고종수. 그는 프로이기에 아름답다'는 펼침막이 늘 걸려 있었다.


다른 종목보다 팀에 대한 팬들의 충성도가 강한 대한민국 풍토에서 선수가 옮길 때마다 응원하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그의 별명 '앙팡테리블'로 명명된 팬클럽에 대한 고마움은 상당하다.


"김호 감독님은 늘 팬에 대해서 소중히 여겨야 하는 마음을 심어주셨어요. 팬들을 만날 때도 슬리퍼를 신고 나가서는 안 된다는 등 세세하게 지적해주셨죠. 예전에 감독님이 좋아하는 팬들과 관광버스 빌려서 여행도 가고 그러던데 저도 나중에 그렇게 해보고 싶어요."


역시 스승의 영향이 컸다. 최근 그는 팬 페이지에 짧은 글을 남겼다. 시즌 종료하면 '회식'하자고….


"예전에는 휴가 때 만나서 신당동에 떡볶이를 먹으러 가고는 했어요. 그땐 대부분 학생이었는데 이젠 다들 성장했잖아요. 결혼도 하고, 돈도 벌고. 이제는 통닭에 가볍게 맥주 한잔하며 이야기했으면 좋겠어요. 어른이니까요."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대전의 연습 시간과 맞물리게 됐다. 마지막으로 만약이란 가정 하에 국가대표에 부름 받을 몸이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여전히 공격형 미드필더인 그의 감각적인 패스를 그리워하는 팬들이 많기 때문이다.


"국가대표에 큰 미련은 없어요. 이미 월드컵에 한 번 뛰어 봤잖아요. 지금은 그런 생각 할 여유가 없어요. 부르면 가는 거고 아니면 마는 거죠. 그래도 나라에서 부르면 당연히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개인에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시원시원한 대답, 그러면서도 뭔가 생각이 많아진 그의 모습이다. 새로운 전환점에 서 있는 고종수가 어떤 길을 선택해 걸어갈지 궁금해진다.

-- 출처 : 오마이뉴스(www.ohmynews.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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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다할아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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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퍼거슨 감독의 맨유 감독 취임 21주년을 맞이해서 맨체스터이브닝뉴스에서
퍼거슨 감독의 역대 영입선수 21명을 순위별로 선정해서 발표했습니다.



21위는 87년부터 98년까지 맨유 선수로 있었던 브라이언 맥클레어가 선정됐습니다.
당시 85만 파운드로 영입했으며, 그후 맨유에 12년 간 있으면서 스트라이커던 혹은
미드필드던, 포지션에 가리지 않고 묵묵히 뛰었으며, 나중에 코치생활도 맨유에서 하면서
팀에 충성해 온 선수라고 추켜세우고 있습니다.




20위는 작년 시즌 후반기에 임대로 영입한 헨릭 라르손을 선정했습니다.
비록 임대로 와서 13경기 밖에 뛰진 않았지만 팀에 끼친 영향을 결코 괴소평가 되어선
안될 선수라고 합니다.
만약 그가 작년시즌 계속 뛰었다면 맨유의 작년시즌의 챔피언스리그에 영향을 끼쳤을
거라고 주장합니다.



19위는 현재 맨유의 중앙수비수인 비디치 선수를 꼽았습니다.
영입 초기에는 불안했지만 나중에 그는 맨유 수비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면서
과거 맨유 주장인 스티브 브루스를 연상케 할만큼 용기와 골본능이 있다고 합니다.




18위는 현재 맨유 수문장인 반데사르 골키퍼를 꼽았습니다.
과거 피터 슈마이겔 이후 그에 가장 필적할만한 선수라고 평가합니다.




17위는 스트라이커인 드와이트 요크가 선정됐습니다.
지금도 맨유 팬들은 그가 얼마나 뛰어난 선수였는지를 모른다고 하면서 맨유가
트레블을 달성할 때에 뛰어난 선수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16위는 현재 수비수인 리오퍼디난드를 선정했습니다.
맨유가 자랑하는 클래스 수비수이이며 맨유 선수로서 시즌 데뷔할 때 리그우승의
수훈갑이었다고 합니다.




15위는 아직도 선수생활을 하는 테디 쉐링엄을 꼽았습니다.
에릭칸토나가 31살의 나이로 은퇴를 선언했을 때, 동갑내기인 쉐링엄이 그의 대타로
맨유에 입단했고, 4년동안 맨유의 트레블 달성을 포함한 리그우승에 기여한
선수로 꼽힌다고 합니다.



14위는 앤디콜 선수를 선정했습니다.
당시 글랜호들 대표팀감독을 포함한 세간에 끊임없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 왔던 선수지만
그는 맨유선수로서 275 경기에 나와서 121골을 넣으면서 5번의 리그우승, 2번의 FA컵
그리고 챔피언스 리그 우승의 공로자라고 합니다.




13위는 맨유 중앙수비수였던 얍스탐 선수를 꼽았습니다.
그의 파워풀한 수비력으로 맨유 트레블 달성의 일등공신으로 꼽았습니다.
만약 맨유가 그를 서둘러 팔지 않고 팀에 잔류했다면 아마도 맨유는 챔피언스리그를
4연패까지도 가능하게 할수 있었다고 평가합니다.



12위는 웨인루니를 곱았습니다.
폴게스코인 이후 활력이 넘치는 재능있는 선수가 없었다가, 웨인루니가 출현하면서
맨유는 그를 잡았고, 맨유 데뷔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여 2700만파운드의
엄청난 몸값을 지닌 가치를 증명한 선수라고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맨유에서 그는 더욱 지대한 공헌을 할 선수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11위는 89년부터 98년까지 맨유에 있었던 수비수인 게리 펠리스트가 선정됐습니다.
89년 당시 230만 파운드로 미들브스로에서 영입했는데 당시는 잉글랜드리그의
역대 최고 이적료라고 합니다.
당시 맨유 데뷔 전에서 실수로 2골을 헌납하면서 최악의 데뷔전을 치루었지만
그후 다시는 그런 실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10위는 현재 맨유 최고의 에이스로 거듭난 크리스티아노 호나우두가 뽑혔습니다.
베컴의 후계자로 영입된 그는 볼튼 데뷔전에서 현란한 기술로 팬들을 매료시켰고
지금은 세계 최고 선수 가운데 하나로 성장했다고 합니다.




9위는 현재 버밍햄의 감독이자 당시 맨유 주장이었던 수비수 스티브 브루스가
선정됐습니다.
당시 수비의 핵심인 테리부처가 떠나면서 그 대안으로 브루스를 영입했고,
그후 퍼거슨 감독은 그가 있을 동안 다시는 테리부처를 그리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8위는 현재 블랙번 감독인 마크 휴즈를 선정했습니다.
원래 그는 퍼거슨 감독이 오기 전에 바르셀로나로 옮겼지만 나중에 퍼거슨 감독은
88년에 그를 다시 데려오는데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팀에 있을 동안 휼륭하면서도 활력이 넘치는 골을 넣었는데, 특히 90년도 FA컵의
결승전에서 크리스탈팰리스를 상대로 2골, 컵위너스컵 때에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스트라이커로서 자기 역할을 다한 선수였다고 합니다.



7위는 작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올레 군나르 솔샤르를 곱았습니다.
경기 도중에 벤치에서 일어나 놀라운 활약으로 골을 넣은 슈퍼서브 이상의 선수였다고
하면서 특히 99-2000시즌에 챔피언스리그의 결승 전에 승리의 최고 주역이라고 합니다.



6위는 작년 시즌 직전에 레알마드리드로 옮긴 반니스텔루이가 선정됐습니다.
치명적인 무릎 부상을 극복하고 맨유에 있으면서 217경기에서 150골을 넣은
골머신이라고 칭찬합니다.
그런 그의 기록은 과거 맨유 전설인 바비찰튼과 데니스로에 비견된다고 평가합니다.




5위는 1990년 부터 2000년까지 맨유에 있었던 데니스 어윈을 선정했습니다.
맨유 역대 최고의 좌측윙백 중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으며 거의 실수가 없는 선수였다고
합니다.
퍼거슨 감독 밑에서 그는 기복이 없이 언제나 똑같은 실력을 발휘했다고 합니다.




4위는 이제 맨유의 살아있는 전설이 된 라이언 긱스가 선정되었습니다.
데이빗베컴, 폴스콜스, 니키버트, 네빌 형제를 포함한 맨유 유스시스템이 길러낸
걸작품이라고 합니다.
맨유 데뷔 이후 15년간 줄곳 좌측에서 끊임없는 최고의 플레이를 선사해 왔으며
앞으로도 바비찰튼이 보유한 759 경기 출전기록를 깰 선수라고 합니다.



3위는 현재 선더랜드 감독인 로이킨이 선정됐습니다.
93년에 브라이언 롭슨의 후계자로 영입했으며 중앙미드필드로서 90년대를 통해
맨유의 심장으로 자리잡으면서 맨유의 영광을 펼치 선수라고 합니다.




2위는 91년부터 99년까지 맨유의 수문장으로 활약한 피터 슈마이겔 골키퍼가
선정됐습니다
맨유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이면서 맨유의 가장 위대한 선수라고 평가합니다.
당시 브론드비에서 55만 파운드에 영입했는데, 퍼거슨 감독은 이런 이적거래를
가리켜서 세기의 바겐세일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퍼거슨 감독이 영입한 역대 최고 선수 1위는 에릭 칸토나가 선정됐습니다.
과연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맨유가 이 위대한 영광이 있었겠느냐고 반문합니다.
86년에 퍼거슨 감독이 팀을 맡으면서 리빌딩의 일환으로 영입한 그는 그후 부터
수많은 맨유의 영광을 이루어 낸 선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활약은 맨유의 골든제네레이션인 긱스,베컴, 스콜스 등에도
영향력을 미쳤고 이제 맨유의 전설이 된 선수라고 합니다.


글쎄요..
아마도 많은 맨유 팬들이 베컴?은 왜 없지라고 할수도 있을 것 같네요.
그리고 맨유 팬들이 평가는 역대 최고의 미드필드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폴잉스도
안 보이네요.
그리고 지금도 뛰는 폴스콜스도 낄수 있을 것 같고, 묵묵히 맨유의 우측 수비를
담당하면서 기복없는 플레이를 펼치는 주장인 게리네빌도 안 보이네요.
아마도 이것은 어디까지나 맨체스터이브닝에서 주관적으로 평가한 기록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참고로 퍼거슨 감독의 최악의 영입도 선정했습니다.
이태리 출신의 골키퍼인 마시모 타이비는 99년 베네치아에서 영입해서 2000년까지
뛰었는데, 아마도 맨유 역사상 가장 최악의 골피커일 거라고 합니다.
그리고 2003-5년까지 맨유에 있었던 젬바젬바 선수는 잠재적으로 로이킨의
후계자라고 평가했지만 결국 실패했다고 합니다.
또한 2003-5년까지 뛰었던 클레베르손도 바르셀로나의 호나딩요 영입에 실패하면서
대신 영입하면서 퍼거슨 감독도 호나딩요에 견줄 선수라고 평가했지만 결국
공통점은 국적이 같다는 사실 하나 뿐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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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다할아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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