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에 대한 이미지는 강하고 견고하다. 한 번 단단히 각인된 그것은 늘 기억의 잔상이 되어 머릿속을 맴돈다. 그 인물이 연예인인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비비안 리를 생각하면 '스칼렛 오하라'가, 심형래하면 '영구'가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잊히지 않는다는 면에선 한편 고맙지만, 상황이나 행동의 변신에 제약이 따른다는 점에서 고착된 이미지는 발목을 잡는다. 문화관광부장관 내정자이지만 아직 노인들 사이에선 '김회장네 둘째 아들'로 기억되는 유인촌의 경우도 그렇다.
그런 면에서 성동일(42)은 어떤 배우일까. 드라마 <은실이>로 혜성같이 떠올랐고 이후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그. 간간이 토크쇼에서 입담을 과시하고 몇몇 드라마에서 조연을 맡아오던 그가 요즘 다시 바빠졌다.
한국영화의 침체기라는 시기. 지난 설에 개봉한 <원스 어폰 어 타임>이 잔잔한 재미로 관객몰이에 성공했고, 극중 성동일은 주연 배우만큼 얼굴을 자주 드러냈다. 또 새로운 의학 드라마의 재미를 열었다는 <뉴하트>에서는 가슴 따뜻한 의사로 열연하며 기존의 이미지를 바꾸는 데 성공했다.
지난 16일 서울 상암동, 토크쇼 녹화를 위해 스튜디오를 찾은 성동일을 만났다. 밤샘 촬영을 하고 몇 시간 눈을 붙이지 못해 피곤한 상태. 하지만 독자와 시청자들을 위해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주윤발 비슷하다고? 나야 감사할 따름"
|
|
"기분 좋다. 허허허. 예상은 못했다. 사실 난 대본대로 갔을 뿐인데 중간 중간 연결을 해주는 역할이라 그런지 많이 들어내지 못한 것 같다. 덕분에 많이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연기력이 좋아서 많이 살린 건 아니냐는 질문에). 그건 아니다. 감독님이 돈 되는 걸 안 거다. 하하하."
- 극 중 총격전을 벌이는 장면이 <영웅본색>의 주윤발을 닮았다는 이야기가 나돈다. 의도적으로 설정한 것인가?
"쑥스럽게 내가 그럴 순 없고, 아마 비슷했다면 감독님이 하신 게 아닐까. 그 장면도 그저 대본에 충실했을 뿐이다. 슬로우로 나오고 하니 그렇게 보였나보다. 그리 봐주시면 나야 감사할 따름이다. 하하하."
- 아직 못 본 분들을 위해 영화 소개를 하자면.
"사실 <원스 어폰 어 타임>은 거창한 역사의식을 가진 영화는 아니다. 큰 감동이나 사랑이 담겨 있는 것도 아니다. 남은 설 세뱃돈으로 편하게 웃고 즐길 수 있는 영화다. 상스런 욕이나 잔인한 장면이 없는 가족영화이니 보시고 후회는 없을 것이다."
- 드라마 <뉴 하트> 촬영으로 바쁘지 않은가. 어려운 점은 없는지.
"잠을 못 잔다. 말이 의사지 거의 환자다. 게다가 의사 역할이란 것이 나뿐 아니라 다른 출연진에게도 큰 부담이다. 써 보지 않은 용어들도 그렇고…. NG가 많이 난다. 일주일 내내 날밤을 세운다. 농담으로 주소지를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는 이야기도 한다."
"'성동일'에 거는 웃긴 이미지, 때론 부담스럽다"
|
- <뉴 하트>에서는 이전과는 다른 캐릭터로 출연하는데 만족하는가?
"많이 만족한다. 뭘 보고 의사 역을 주셨는지 모르겠다. 평소 이미지 대로라면 마사지사나 수의사 역할이 올 줄 알았다(웃음). 길을 지나가면 ‘성동일이다’라고 하지 않고, ‘이승재 선생이다’ 하는 이야기가 들린다. 공부 안 하고 살던 이에게 좋은 역이 왔다.”
- 덕분에 그동안 가져왔던 이미지에서 많이 탈피한 것 같다.
"원래는 감독님이나 작가님이 재미있는 역할을 해 줄 거란 기대를 했는데 거부했다. 그럼에도 다시 그쪽으로 갈까 하는 고민이 들었다. 때때로 카메라 앞에서 '놀아버릴까' 하는 욕구가 치밀어 오른다. 많이 참고 신경을 썼다. 다행히 시청자들이 잘 봐주시는 것 같다."
- 그럼에도 평소 '성동일' 하면 갖는 기대치가 있다. 연기 생활에 부담되지는 않는지.
"부담… 된다. ‘저 놈 나오면 무조건 재미있어야 한다'는 기대가 있기 마련이니. 물론 시청자나 관객이 원하면 하는 거지만, 나이도 40이 넘은 사람이 매번 재미있을 수야 있을까. 한계도 있고, 또 천부적으로 타고난 연기자도 아니다. 그래서 이제 좀 바꾸어야겠다는 생각을 늘 한다."
그의 연기 인생도 어느덧 20여년이 되어간다. 대개의 배우들이 그렇듯 그 역시 데뷔 이전에 대학로에서 연극을 하며 기초를 다졌다고 한다.
- 91년 SBS 공채 연기자로 TV에 데뷔한 것으로 안다. 당시 MBC의 장동건, KBS의 이병헌과 더불어 큰 기대를 받았다는 소문이 있던데.
"허허허허…. 사실이다. 그런데 그게 맞는 것 같다. 캐릭터가 이러니 장기적으론 내가 가장 연기생활이 길지 않을까. 사실 당시 철이 없었다. 좀 더 겸손하고 열심히 했어야 했는데, 그게 안돼서 무명 시절이 길었다."
- 빛을 못 보던 시절, 억울하거나 갑갑한 심정이 들진 않았는지.
"그렇진 않았다. 연극하는 선배들에 비하면 나도 성공이 빠른 사람 중의 하나라고 여겼다. 운 좋게 길거리에서 캐스팅이 된 것도 아니고, 길에 연극 포스터를 붙이며 밑바닥부터 시작했기에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무명 시절이) 길었다, 후회된다'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안 해봤다. 오히려 행복했다."
- 대학시절 전공이 기계과던데, 연기를 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
"술이나 먹고 다니고 연기 쪽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인맥도 없었고…. 대학로를 우연히 찾았다가 운명처럼 연극에 이끌렸다. 당시 마지막까지 함께 하던 이들이 오광록·기주봉씨였는데 다 잘 되셔서 다행이다. 사실 그때는 다 인간 안 될 거라고 생각했다(웃음)."
그는 자신의 출발점이 연극이었던 만큼, 언젠가는 무대에 서고 싶다는 여운을 남기기도 했다.
훌륭한 조연배우는 극의 흐름에 방해가 안 되어야
성동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빨간 양말'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드라마 <은실이>에서 양정팔 역으로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그. 단역에 불과했던 역할을 주인공 못지않게 빛낸 건 그의 탁월한 설정과 연기력이었다.
- 빨간 양말 역할이 원래는 몇 회분 안 되는 걸로 알고 있다.
"잔머리를 굴린 거다. <은실이>가 97년 작인데 데뷔 후 7년을 무명으로 지내다보니 악이 생겼다. 3회 정도 출연이었는데 속된 말로 '좀 튀어나 보고 끝내자'란 생각을 먹게 된 거다. 다행히 집필을 맡으신 이금림 선생님이 예쁘게 봐주셔서 끝까지 갔다."
- 국민적 인기를 얻었지만 이후 이미지 변신에 실패했는데….
"그랬다. 너무 빨리 이미지를 바꿨다. KBS 주말드라마 <유정>에서 주인공 역을 맡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큰 착각이었다. 몇 년 더 해먹었어야 했는데(웃음). 너무 빨리 바뀌니까 시청자들이 헷갈리는 거다. 그 뒤로 다시 하향세를 탔다."
- 드라마든 영화든 조연 배우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 좋은 배우의 자세는 어떤 것일까?
"연기관은 '거부감 없이 다가가자'는 것이다. 훌륭한 조연배우는 극의 흐름에 방해가 되어선 안 된다. 사실 이번 영화에서도 나는 내 분량만 했을 뿐인데, 편집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보였다. 그래서 주연배우 아니냐는 오해를 사고…. 주인공을 맡은 배우들에게 정말 미안하다. 내 몫은 관객들이 지루해 하며 몸을 비틀 때 나타나는 감초 역할 정도다."
"연기로 국민 계몽하고 싶은 생각 없다"
- 주· 조연을 떠나 궁극적으로 맡아보고 싶은 역할이 있는지.
"(단호하게) 없다. 어떤 역할이든 주어지면 찾아가는 재미로 연기를 하는 것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크게 '예술' 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다. 즐기는 것이고 그걸로 인해 파생된 돈으로 가족과 먹고 쓰는 재미지, 연기로 국민들을 '계몽' 하고 싶은 뜻은 없다. 심오한 메시지를 주려하고…. 그런 뜻은 때려죽여도 없다. 그냥 직업인 거다. 남 앞에서 폼 잡고, '난 이런 국민배우가 될 거야' 그런 건 아니다."
- 2005년엔 MBC에서 TV MC 부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토크쇼 등에도 출연이 잦은데.
"사실 상은 말도 안 되는 거다. 처음엔 내가 연기자인데 이걸 왜 해야 하나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인생을 즐기면서 그것이 부(富)로 돌아온다면 나쁘다고 생각지 않는다. 내 판단 하나에 가족이 라면을 먹느냐 고기를 먹느냐다. 생각을 바꾼 거다. 큰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계속 할 생각이다."
|
- 시청자나 관객에게는 어떤 배우로 비쳐졌으면 하는지. 주변에 모델로 삼는 선배나 동료 연기자는 없는가?
"'사람 사는 맛이 있는 배우' 정도? 멋있고 똑똑한 사람은 위인전 보면 다 나오지 않나. 모델은 주저 없이 임현식 선배님이시다. 연기를 가지고 인생을 즐길 줄 아는 분이다. 김명곤·유인촌 선배는 늘 계몽하고 뜯어고쳐야 하니 삶을 즐기지 못하신다. 임현식 선배 같이만 되면 나는 성공한 거다."
- 미니홈피를 보면 일일이 친절하게 댓글도 달아주던데. 한편 선량해 보인다(웃음).
"선량하게 살려고 한다. 그래서 전화번호도 17년째 안 바꾸고 있다(웃음). 사실 나 같은 놈을 친형제들도 신경 안 써주는데, 배 다르고 얼굴 본 적도 없는 이들이 관심 가져준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가."
- 마지막으로 지켜보는 분들에게 인사를 남겨달라.
"사실 내가 먹고 살 수 있는 것은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시는 분들 덕분이다. 가족을 대표해서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손가락질 받지 않고, 욕먹지 않는 배우가 되겠다. 앞으로 한 30년만 열심히 살겠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