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의대에 갈 거야. 수능시험 답은 다 아니까 뭐... 주식도 그때부터 하면 부자되겠네. 하하하..."
10년만에 모인 고등학교 동창회. 누군가 무심코 "10년전으로 돌아가면 뭐할래?"하고 말을 꺼내자 친구들 사이에 금세 이야기 꽃이 핀다. 누구는 벤처사업을 하겠다고, 누구는 고등학교 때부터 사법시험을 준비하겠단다. 한 명도 예외없이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하겠다'고 했을 때는 모두가 웃기도 했다.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자리에 모인 모두가 막힘없이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한다. 다들 삶이 마음처럼 되지 않을 때 한 번쯤 자신이 '가지 않았던 길'을 떠올려봤던 걸까.
'시간을 돌려 실수 없이 다시 한 번 살아볼 수 있다면'. 오늘 소개할 책은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봤을 달콤한 설정으로 무장된 켄 그림우드의 고전급 SF소설 <다시 한 번 리플레이>다.
25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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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켄 그림우드의 <다시 한 번 리플레이> |
ⓒ 노블마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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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0월, 43살의 평범한 방송국 직원 제프는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된다. 그러나 다시 눈을 뜬 제프의 눈앞에 펼쳐진 세계는 1963년 5월. 늘어진 뱃살은 온데간데 없는 풋풋한 대학 신입생이 되었지만 죽기 전까지의 기억은 여전히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있는 18살 소년. 1988년까지 일어날 일은 모두 알고 있다. 이제 뭘 하면 될까.
제프는 미래를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지극히 상식적인 순서로 실수를 피하며 두번째 삶을 이어간다. 자세한 시대적 묘사와 함께 매끄럽게 이어지는 제프의 인생. 독자는 자신이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두번째 삶을 자연스럽게 대리만족 할 수 있게 된다.
제프의 재산은 별다른 노력 없어도 역사적인 변곡점과 발맞춰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합법적이면서, 로또 정도로는 1등을 해도 도달할 수 없는 꿈의 액수다. 직장인들 중 대다수가 꿈꾸는 불로소득의 결정판이라고나 할까.
실제로 2007년 한 연봉전문사이트의 조사에 따르면 설문조사에 응답한 전체 직장인의 45.7%가 업무 중에 주식에 열중하고 있으며 31%는 외근이나 회의와 같이 장시간 주식동향을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 불안감을 느낀다고 한다. 이렇게 주식에 신경을 쏟지만 5명중 1명은 원금의 절반을 까먹는다고 하니,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제프가 왜 그같은 선택을 했는지 왠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돈 많은 제프의 삶은 이런 식으로 승승장구를 거듭한다. 그러나 아마 끝까지 이렇게 이야기가 매듭지어졌다면 이 책은 그저 그런 성인용 동화 정도에 머물렀을 것이다. 진짜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작품 속에서 죽으면 현실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고 어느 배우가 말했던가. 제프의 두번째 삶에서 43살이 되던 1988년, 또 다시 제프는 심장마비로 죽게 된다. 그리고 18살로 다시 살아난다.
시작은 좋았다. 43살에 죽으니 18살 싱싱한 육체로 환생. 금방 부자가 되고 부가 기본으로 깔린 초호화 인생이 이어진다. 그런데 이런 삶이 25년 주기로 반복된다고 해도 마냥 좋기만 할까. 자신이 죽을 날짜와 시간, 그 모습이 매번 너무도 명확하다고 상상해보라.
위와 같은 설정으로 인해 독자가 제프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은 자연스럽게 변화된다. '이번 뿐'이라 여겼던 인생의 초점이 '뭔가 대단한 지위나 부를 성취하는 것'에 맞춰졌다면 25년 단위로 반복되는 제프의 삶에서는 부나 명예가 점점 중요치 않아진다. 때문에 사회적인 성취보다는 '이번 25년을 어떻게 살아가는가' 더 중요해지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 SF
국내에서는 이제서야 번역된 이 책이 <미저리>등 유수의 SF소설을 제치고 1988년 세계판타지상(World Fantasy Award) 대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저력이 바로 이 부분에서 나온다. 한 번 뿐인 우리의 삶에서 결코 놓을 수 없다고 여겼던 부분들을 제프는 여러 삶을 반복하면서 하나 둘 내려놓는다. 그리고 정말 놓을 수 없는 것을 찾으며 그것을 위해 살아가게 된다.
주변을 둘러보면 요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성취해야 할 목표가 참 많은 것 같다. 고등학생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응당 대학에 가야하고 대학생들은 대학을 졸업하면 바로 취업을 해야하고, 취업을 한 직장인들은 몇 년 안에 종자돈을 만들어 돈을 불리고 집을 사야한다는 것이 사회의 암묵적인 분위기가 아닌가.
'정신없이 일하다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휴일에 손바닥만한 집에 누워있는 내 나이가 마흔이 넘었더라'는 지인의 푸념이 떠오른다. 제프는 정신없이 일하다 죽은 후 18살로 부활하고 여러 삶을 살며 삶의 의미를 찾았지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프 같은 기회는 갖지 못한 채 오직 한 번으로 삶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한 번 뿐인 삶.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도통 감이 안 잡힌다면 이 책을 읽는 것도 좋은 선택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