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분명히 당장 밥을 굶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 급식비를 밀리지도 않았으며 공과금을 연체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오늘 돈 써야 할 일에 돈을 쓰고 있고 내일도 어디 가서 돈을 꿔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나는 매일 돈 때문에 걱정합니다. 아침부터 저녁 때까지 돈 이야기를 가장 많이 하고 있고 돈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요. 왜 그럴까요?"
지난해 펀드 수익이 고공행진 하고 부동산 값이 천정부지로 상승하던 분위기일 때 어느 고객이 한 말이다.
실제로 상당수 사람들이 지난해까지 돈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돈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고, 심지어 대통령을 뽑거나 국회의원을 뽑을 때조차 경제 문제를 도덕성보다 더 중요시하기도 했다. 몇 사람만 모여도 주식 이야기와 부동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주부들끼리 모여도 과거에는 주로 아이들 이야기, 남편과 시댁 흉을 보는 시간이 많았다면 근래에는 돈이 되는 정보를 주고 받는 것이 상식처럼 되기도 했다.
직장 동료들이 함께하는 저녁 회식 자리조차 재테크 성공담을 들려주는 동료가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점점 재테크 책을 사보고 재테크 강의를 다니고 재테크 기사를 열독하는 것을 현대인의 필수처럼 여기는 분위기였다.
이 속에서 여전히 재테크에 무심한 사람은 게으르거나 시대에 뒤처지는 사람으로 오인받기도 했다. 재테크에 무심한 당사자조차 혼자만 가난해지는 것 같은 소외의식을 경험하면서 이유 없이 불행해지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열심히 '돈돈' 거리며 재테크를 하거나 적어도 재테크를 해야만 할 것 같은 강박관념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돈돈 거린 결과는 처참하다.
2000포인트를 넘어 3000선까지 갈 것이라던 주가가 1000선이 무너졌고 대박수익에 대한 기대심으로 안전자산까지 몰아 넣은 펀드는 손실액이 55조원을 넘어서고 있다.
자고 일어나면 천만원씩 오른다는 부동산은 견고해 보이던 불패 신화가 폭락 우려로 변화 되고 있다. 집으로, 펀드로 묶여 있는 대한민국 가정 경제는 하루가 다르게 오르고 있는 이자 부담으로 가구당 4천만원가량의 부채에 신음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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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억 만들기' 열풍이 가정 경제 병들게 해
인천에 사는 강아무개씨가 현재 보유하고 있는 자산은 펀드 120만원, 부동산 자산 1억6천만원이 전부이다. 올 초까지만 해도 7천만원의 무리한 부채를 끼고 산 집이 연일 오르는 분위기였다. 월 250만원 소득에서 7천만원에 대한 이자 부담은 저축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지만 집값이 올랐기에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심지어 20평형대 아파트에서 사는 것이 답답하다는 생각으로 30평형대 빌라로 옮겨 타기위해 그나마 갖고 있던 예금 자산 400만원을 다 털어 계약했다. 현재 살고 있는 집을 팔아 잔금을 치르면 될 것이란 생각이었다. 그러나 집을 내놓았지만 보러 오는 사람도 없다.
그나마 갖고있는 펀드 자산은 계속 까먹고 있는 처지이고 더 빚을 낼 수도 없는 답답한 상황이다.
평범하게 살아오던 강씨가 갑자기 7천만원이란 큰돈을 빌려 집을 사게 된 것은 그가 유난히 탐욕이 많아서가 아니다. 집으로 돈 벌겠다는 욕심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고 무리한 부채를 끼고서라도 단숨에 큰 수익을 실현하려는 대박에 대한 기대심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강씨의 그런 욕심은 '부자 되세요'라는 인삿말처럼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것이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바로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무리해서라도 집은 사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올해 초 상담을 통해 주택을 처분하고 빚을 갚은 어느 고객은 친정엄마로부터 '집을 팔다니 귀신 들렸다'라며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주변에서 조금씩 불씨들이 자라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무조건 낙관했고 낙관 속에서 돈돈 거리는 사회 분위기에 휩쓸려 위험의 징조들을 무시했던 것이다.
병적인 낙관이 가정경제를 벼랑 끝으로 내몰아
현재의 경제위기는 주가 3천을 자신하던 대통령의 말처럼 어느날 갑자기 외부 요인들에 의해 생겨난 불운이 아니다. 전문가들의 낙관은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단지 예측 불가능한 글로벌 경제의 변덕 때문에 생긴 불운이 아님은 분명하다.
위험의 징조는, 거슬러 올라가면 지난해부터 본격화되었고 2004년부터 이미 미국 중산층 몰락을 우려한 이야기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감안할 때 훨씬 오래 전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무슨 마법에 걸린 사람들처럼 미래를 지나치게 낙관하기만 했다. 전 세계 부동산 시장이 하락세로 돌아선 분위기에서도 대통령이 바뀌고 정권이 바뀌어 집값이 더 뛸 것이라며 뒤늦게 무리한 대출을 끼고 집을 사는 사람들이 올 상반기 주택시장을 끌어 올리기도 했다. 미국이 서브프라임의 소용돌이에 더 큰 위기를 맞고 있을 때에도 주가가 더 오를 것이라는 예측을 쏟아내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낙관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라 낙관적으로 믿고 싶어하는 것에 더 가까웠다. 경제적 현상이란 늘 복잡해서 경우에 따라 양면성이 있다. 단편적인 경제적 현상 이면에는 기회와 위험이 늘 따라다닌다. 따라서 기회는 잡고 위험은 통제해야 하는데 우리는 기회는 맹신하고 위험은 지나쳐 버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연초 무섭게 치솟던 유가로 세계 경제를 위협하게 된 것이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유가가 올라 대체 에너지를 개발하느라 밀가루 등의 곡물 수요가 급증해 곡물가격도 따라 오른다며 지난해부터 '에그플레이션'이란 신조어가 유행하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경제변수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유가 상승과 곡물 가격 상승조차 경기가 좋아질 것이란 전망의 재료로 활용되기도 했었다. 지난해 어느 경제 연구소의 한 연구원은 "과거 미국 경기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한국이지만 이제 미국보다는 신흥시장 성장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며 "완벽하지는 않지만 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양호한 흐름을 보이는 제한적 디커플링이 예상된다"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올 초에는 어느 고객이 은퇴를 2년 앞두고 빚을 내서 강남에서 인기리에 분양하고 있는 상가에 투자를 고민하며 상담을 의뢰하기도 했었다.
올해 미 경제 불안과 글로벌경제의 악재가 많아 금리 상승 우려가 있으니 빚을 내서 투자하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고 조언해 주었다. 그러나 그 고객은 미국 금리가 떨어져 우리나라 금리와 차이가 나니까 조만간 우리도 금리를 떨어뜨릴 것이란 전망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금리가 떨어져 다시 한 번 자금이 부동산으로 몰릴 것이란 진단이 우세하며 따라서 다소 위험 부담이 있더라도 투자가치가 있는 부동산을 저가 매입할 기회가 아니냐는 것이다.
정보를 객관화시켜 미래를 냉정하게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모습으로 맹목적으로 믿고 그 믿음을 합리화하기 위해 정보를 짜맞추고 있는, 한 마디로 병적인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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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그렇게 우리는 맹목적으로 미래를 낙관했던 것일까?
아마도 이미 일을 벌여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오를 것이란 판단으로 부동산에 주식에 펀드에 너무 많은 돈을 묶어 놓았고 심지어 투자를 위해 빚까지 지고 있기 때문에 경제 위기를 가정해 보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닐까.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자는 것은 잔칫상에 찬 물 끼얹는 괘씸한 비관론, 불안을 조장하는 괴담일 뿐이라고 여기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위험신호는 무시하고 잘될 것이란 이야기만 골라 듣는 가장 큰 이유는 '욕심' 때문이다.
더 잘 살고 싶은 욕심, 더 많이 소비하고 싶은 욕심, 더 빨리 돈 걱정으로부터 벗어나고픈 욕심, 내 아이에게 더 많은 지원을 해줄 수 있는 부모가 되고픈 욕심.
이런 욕심은 사실 그리 욕할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 있을 당연한 욕구에 가깝다고 봐야한다. 다만 막연한 욕심이다 보니 이리저리 분위기와 시류에 휩쓸려 욕심을 채우기보다 화를 당할 위험이 더 크다는 데 문제가 있다.
애초 돈을 신봉하려던 것이 아닌데 자꾸 몰아붙이는 어떤 힘에 의해 돈돈 거리게 되고 돈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심지어 재테크 광기에 휩쓸렸던 것이다.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가정 경제 구조조정 나설 때
사례의 강씨는 상담을 통해 빌라 계약금을 포기하고 계약을 해지했다. 혹시나 하는 심정에 입주날까지 상황을 주시해 보자고 생각하며 막연한 불안함을 유지해 왔다. 막연한 불안함 속에서 당장의 지출구조는 금융비용과 과도한 보험료가 지출의 절반을 차지하는 현금 흐름을 어렵게 유지해 온 것이다.
세계 경제가 'D의 공포(depression)', 즉 불황을 지나 'R의 공포(recession)', 경기 하강으로 넘어가고 있다. 경기하강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소득의 변화, 소득이 감소하거나 중단 될 위험까지 겹치는 최악의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와 같이 금융자산이라고는 손 댈 수 없는 펀드 자산이 전부인 상태에서 더 넓은 집으로 이사갈 계획만을 막연히 바라고 있는 것은 최악의 상황으로 몰고갈 위험이 있다.
주택 확장 계획에 대한 미련을 과감히 접고 보험을 구조조정하고 자녀 사교육비를 줄여 유동자금을 확보하는 것이 시급했다.
부채를 줄이는 것은 당장 불가능한 일이고 그보다 먼저 급한 것이 최악의 경우 소득 중단에 대비해 가계 비상금을 마련하는 것이다. 따라서 보험 조정으로 생긴 약간의 해약환급금, 목돈은 별도의 비상금 통장에 넣어두고 전체적인 소비 지출도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초 긴축으로 조정했다.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경제 위기에 여전히 강씨와 같이 막연한 불안함만을 안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소비지출을 줄이고는 있으나 아직도 최악에 대한 구체적인 상상은 외면하고 있다.
그러나 최악을 가정하는 것은 마음만 불편하게 만들 불필요한 것이 아니다. 부채 상환에, 과도한 교육비에 숨쉴 틈이 없는 가정 경제 구조에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바로 최악에 대한 상상이다. 지금이라도 이런 마음의 불편을 감수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