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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프로야구에서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갖기 위해 타자는 9년 동안 시즌 경기의 2/3 이상을 출장해야 하고, 투수는 규정이닝의 2/3이상을 던져야 한다. 그래서 FA계약이라는 것이 어차피 '이미 검증된 선수'인 동시에 '어쩌면 전성기가 지나고 있을지도 모를 선수'와의 계약이며, '그동안 수고한 것을 보상받고 한숨 돌리려는 선수'와 '앞으로도 최소한 그만큼은 해줄 것으로 기대하는 구단' 사이의 엇갈린 속내와 계산이 만나는 순간이다.
그러나 어차피 '관중 수'가 아닌 '포스트시즌 진출 여부'를 통해 경영자의 운명이 갈리는 한국 프로야구에서, 그것은 이미 '합리적인 계산'보다는 아무리 돈을 털어 넣어서라도, 그리고 혹 둘에 하나쯤 실패를 해서 돈만 홀랑 날리는 한이 있더라도 기꺼이 돈을 우겨넣어 잡고 보아야 하는 몇몇 대기업간의 돈싸움이 되고 만다. (그런 점에서, 액수를 곱씹을 때마다 서로 민망해질 만큼 부풀어 오른 터무니없는 몸값을 놓고 남의 탓을 해대는 프로구단들의 삿대질이야말로 적반하장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사상 최악의 FA계약으로, 나는 1999년 삼성 라이온즈와 이강철 선수 간의 계약을 꼽는다. 1억에도 못 미치는 계약이 두 건이나 있었던 'FA원년' 1999년의 일임을 감안하더라도 요즘 기준에 비추어보자면 출혈이라 할 수도 없을 헐값인 '고작 8억'(3년간)에 불과한 규모였지만, 오로지 우승을 위해 얼마든지 돈으로 승부를 낼 각오를 하고 있던 구단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애초에 FA계약에서 돈이야 중요한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이강철을 '최악'으로 꼽는 이유는, 그가 계약 직후부터 부상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간신히 돌아온 마운드에서 거둔 성적도 1승에 불과한 이른바 '먹튀'였기 때문만도 아니다. 그보다도 그가 그런 끔찍한 부진 끝에 1년 반 만에 친정팀으로 복귀하더니, 이번에는 거짓말처럼 재기해 온갖 투수 부문의 '역대 최다' 기록에 이름을 올리며 '꾸준함의 상징'으로 거듭난 선수였기 때문이다.
상대팀에 8억이라는 막대한 금전적 손실을 입혔을 뿐 아니라, 보상선수로서 '라이온즈의 정신'을 상징하던 박충식과 바꾸어짐으로써 상대팀 구단과 팬 사이를 동요시켰다. 결국에는 친정팀으로 돌아와 당당히 재기함으로써 삼성에 몇 배의 정신적 타격을 입힌 내공 깊은 복합공격을 보여주었다.
1인자는 바뀌어도 2인자는 항상 이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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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잘 하는 선수였고, 언제나 잘 하는 선수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의 진가를 발견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려야 했고, 아직까지도 그의 가치는 모두 알려지지도 못한 채 잊히고 있기도 하다.
그가 고교무대에서 활약하던 시절, 광주일고를 대표했던 것은 문희수, 그리고 박준태였다. 광주일고가 대통령기와 봉황대기, 황금사자기를 3연패했던 1983년, 동기생 박준태는 두 번 최우수선수로 선정되었고 한 해 선배 문희수는 최우수선수에 한 번, 우수투수에 두 번 이름을 올렸다. 치질수술을 받고부터 부쩍 자란 키와 체격 덕분에 급성장한 3학년 시절, 그 역시 황금사자기 우승을 이끌어내며 우수투수에 선정된 '스타'였지만, 그것까지 기억에 담아둔 야구팬들은 흔치 않다.
호리호리한 몸매에서 믿을 수 없는 강속구를 뿜어내며 한 해 앞의 세대를 휩쓸었던 선배 문희수는 그렇다 치더라도, 투수는 물론 내외야수와 포수까지 섭렵하며 야구가 요구하는 모든 면에서 발군의 실력을 뽐내던 동기생 '천재' 박준태를 다루기에도 미디어의 지면은 부족했던 것이다. 심지어는 이강철이 전국무대 '우수투수'로 우뚝 섰던 1984년 황금사자기에서조차 최우수선수는 박준태의 몫이었던 것이다.
동국대 시절에는 1년 선배 송진우의 부상 덕분에 잠시 에이스 역할을 맡기도 했었지만, 1989년에 들어선 프로무대에서도 그의 '2인자' 인생은 계속되었다. 그 역시 국가대표를 지내며 나름 유망주로 인정받고 있었지만, 언론의 주목은 한 해 먼저 지명을 받고도 올림픽 출전 때문에 같은 해에 해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게 된 '제 2의 선동열' 조계현이 독차지하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첫 해 7승에 머물렀던 조계현의 두 배가 넘는 15승의 깜짝 활약을 펼치며 화려한 첫 발을 내딛긴 했지만, 같은 해 태평양의 무명 고졸 신인인 같은 잠수함 투수 박정현이 무려 19승을 올리는 바람에 신인왕을 놓친 것은 '만년 2인자' 인생의 서막에 불과했다.
214.2이닝을 던지며 193개의 삼진을 잡아냈던 1991년에는 210개를 기록한 선배 선동열의 뒤로 밀려나야 했고, 기복 없이 15승 이상을 기록하며 맞이한 4년차 1992년에는 무려 18승을 올리는 기염을 토하지만, '기록의 마술사' 김영덕 감독이 연출한 대학 1년 선배 송진우의 '다승왕(19승)-구원왕(25세이브포인트)' 동시석권 마술에 휩쓸려 일생일대의 다승왕 타이틀 획득에 실패하기도 했다.
그 뿐이랴, 그는 사상 최다인 세 번의 '1안타 완봉'경기 기록을 남김으로써 끝내 '노히트노런' 투수 명단에 이름을 남길 '삼세번'의 기회를 날린 셈이 되었으며, 1992년에는 155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유일하게 순위표 맨 윗줄에 이름을 남기기도 했지만, 이듬해인 1993년부터 공식타이틀로 인정되며 시상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결국 그가 가질 수 있었던 타이틀은 한 개도 없었던 셈이다. (1992년까지 탈삼진에 대한 시상은 하지 않았다)
거북이 이강철, 국보 투수 선동열 추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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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잘 하지만 '가장' 잘 하지는 못하는 선수. 그래서 언제나 그 자리에 있지만 굳이 찾아보지 않으면 눈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 그런 이강철이 사람들의 기억 밖에서 야금야금 쌓아올린 금자탑이 바로 10년간 기록한 두 자릿수 승리와 세 자릿수 탈삼진이다.
데뷔 첫 해인 1989년 15승으로 출발해, 컨디션과 운이 받쳐주는 해에는 18승으로 정점을 찍고 그렇지 못했던 해에는 10승으로 바닥을 다지며 이어진 것이 10년차였던 1998년까지였고, 1998년 역시 출발점과 꼭 같이 승수는 15였다.
그동안 그는 단 한 해도 거르지 않고 150이닝 이상을 던졌고, 65번의 완투와 18번의 완봉승을 곁들였다. 선동열이나 최동원처럼 이름만으로 상대 타선을 얼어붙게 만드는 카리스마는 없었지만, 해마다 3점대 초반 혹은 2점대 후반의 평균자책점으로 버텨냈고, 마지막 순간에 웃었다.
2004년 5월 13일, 그는 현대 강귀태를 상대로 1699개째 삼진을 잡아내며 선동열을 추월해 '통산 최다 탈삼진 기록 보유자'로 등장했다. 일찌감치 완주를 끝내고 일본까지 찍고 돌아와 '영원한 국보'로 자리 잡은 신화 선동열의 기록이, 느릿느릿 쉬지 않고 기어온 거북이 이강철에 의해 추월당하는 순간이었다.
그 뒤로 조금 더 기어나간 그의 기록은 1749에 멈추어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 더 빠르고 조금 더 끈질기게 달려와 '끈기'라는 면에서조차 이강철을 2인자로 밀어내버린 송진우가 그 기록을 추월하고 다시 1970까지 밀어올리고 있지만, 이강철이 잠시나마 가장 높은 곳에 머물렀던 순간이었다.
사상 첫 FA, 사상 첫 '먹튀'?
1999년, 10년 이상 활약한 선수들을 대상으로 처음 FA제도가 시행되었을 때 가장 먼저 그 혜택을 본 것이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거액인 3년간 7, 8억씩을 손에 쥐게 된 이강철, 송진우, 김동수였다. 여러모로 까다롭고 조심스러웠던 '첫 해'였기에 '10년 이상 활약한 선수들' 중에서 가장 젊은 1989년과 1990년 입단 선수들이었고, 또한 지나온 10여 년 간 한결같은 활약을 보여준 이들이었다.
사실 이강철은 1999년 시즌을 앞둔 동계훈련에서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를 다치면서 한 해를 통째로 쉬어야 했고, 그 사실은 그를 영입한 삼성 라이온즈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10년간 10승과 100탈삼진을 하한선으로 알고 살아온 선발투수, 그것도 힘보다는 제구력과 각도 큰 변화구로 승부하는 노련함을 주 무기로 하는 투수의 노하우에 의심을 품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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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000년, 1년 만에 돌아온 마운드에서 그는 고작 37이닝만을 던지며 1승 4패, 7.30이라는 낯선 성적표를 받아들고 말았고, 삼성 구단의 절망과 새로 부임한 옛 스승 김응용 감독의 배려, 그리고 타이거즈를 인수해 신장개업한 기아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며 1년 반 만인 2001년 시즌 중반에 2억원에 현금트레이드 되어 원대 복귀하는 초라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왼쪽 다리를 역동적으로 내디디며 몸을 비트는 잠수함 투수의 까다로운 투구 폼, 그것을 지탱하기에 부실해진 오른 무릎이 내내 말썽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넉넉하게 믿으며 기다려줄 고향 팀이 아니라 '한시라도 바삐 돈값을 뽑아내야 했던' 타향 팀 라이온즈, 그 곳에서 그리 독하거나 넉넉하지 못했던 그의 심성이 내내 쪼그라들고 긴장하며 스스로 무너져 내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친정팀으로 복귀하면서 모든 것은 다시 안정을 찾아갔다. 심리적 안정이 신체적 밸런스를 뒷받침했고, 이듬해인 2002년 그는 4년 만에 다시 100이닝 이상을 던지며 3.17의 훌륭한 평균자책점과 함께 5승과 17세이브를 올릴 수 있었다.
이제 선발투수에서 구원투수로 보직이 바뀌었고, 더 이상 해마다 200이닝을 던질 수도, 10승과 100개 이상의 삼진을 잡아낼 수도 없었지만 그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 낮아진 평균자책점으로 침착하게 경기를 조율했고, 상대방의 예봉을 진정시켜나갔다. 2003년에는 1.98의 평균자책점으로 6승과 9세이브, 2004년에는 2.95의 평균자책점에 6승과 7세이브였다. 그 시절 타이거즈는 이미 더 이상 '최강'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타이거즈'였고, 팬들은 그것을 이종범과 더불어 이강철을 통해 확인하곤 했다.
타이거즈 왕조의 조용한 대들보, 이강철
한희민과 박충식, 조웅천과 임창용까지 잠수함 투수들의 우연한 공통점이기도 하지만, 이강철 역시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선이 곱고 여성적인 외모에 우아한 투구동작으로 절묘한 궤적의 공을 뿌리는 선수였다. 그리고 꼭 그렇게 그는 부러질 듯 부러질 듯 휘어지며 강하게 부딪혀오는 상대를 통제했고, 그런 내공으로 90년대 '해태 타이거즈 왕조'를 떠받혔다.
그가 없었어도 해태 타이거즈는 강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왕조'라고 부를 수는 없었을 지도 모른다. 천하의 선동열도 때로는 벤치를 지켰고, 불굴의 '싸움닭' 조계현도 지쳐 숨을 고르는 시간이 있었지만, 그들의 등 뒤 팬들의 환호성도 채 닿지 않는 조용한 공간에서는 언제나 가쁜 숨을 속으로 삼키며 끈질기게 걷고 또 걸은 이강철이 추락의 하한선을 그어놓고 반격과 새 출발의 근거를 마련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함이나 기록의 높음, 빠름, 꾸준함. 그 모든 면에서 철저하게 2인자의 길을 걸어온 그였기에 돌아보고 살펴볼수록 더 놀랍고 대단한 것이 이강철의 기록이다.
신의나 진실함이나 순수함 같은 것들이 대개 그렇듯, 가치 있는 것들에 항상 높은 가격이 매겨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 프로야구 사상 가장 꾸준하고 안정적인 선수였던 이강철이 FA 계약이라는 극적인 순간에 '최악의 상품'으로 검증된 적이 있었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17년간 쉼 없이 달려 쌓아놓은 결코 작지 않은 봉우리와 그에 대한 우리들 기억의 높이를 비교해보면, 꼭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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