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태왕의 일대기를 다룰 <태왕사신기>
ⓒ MBC
 

오는 9월 10일 스페셜 방송을 시작으로 <태왕사신기>(연출 김종학 윤상호 극본 송지나 박경수)가 시청자 앞에 첫 선을 보인다. 거대한 스케일과 천문학적인 제작비, 그리고 한류스타 배용준의 캐스팅 등으로 화제를 낳은 <태왕사신기>는 네 차례나 방영이 연기되면서 많은 논란도 일으켜왔다.


이제 첫방송을 앞두고 다소나마 안정이 된 것처럼 보이지만 <태왕사신기>는 여전히 논란이 될 요소를 떠안고 있다. 지금부터 5가지 측면에서 <태왕사신기>의 문제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광개토태왕의 일대기를 24부에 제대로 담을 수 있을까?

 

우리나라의 사극은 보통 50~60부작 정도로 기획되어 방영이 되고 있다.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주몽>(연출 이주환 김근홍 극본 최완규 정형수 정인옥)이나 <여인천하>(연출 김재형 극본 유동윤)처럼 연장이 되어서 80부작 내지는 100부작 이상으로 중간에 변하는 경우도 있다. 아니면 <대조영>(연출 김종선 극본 장영철)이나 <불멸의 이순신>(연출 이성주 김정규 극본 윤선주)처럼 처음부터 100부작 이상으로 기획되는 작품도 있다.


이에 비해 <태왕사신기>는 24부작으로 앞서 언급한 사극들에 비하면 무척 짧은 편이다. 물론 <태왕사신기>처럼 짧은 사극이 그동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사 박문수>(연출 정인 극본 고동률 유진희)는 15부작이었고 최근 막을 내린 <한성별곡-正>(연출 곽정환 극본 박진우)는 8부작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런 작품들은 그 시대의 일부 에피소드를 토대로 구성한 드라마였기에 <태왕사신기>와는 성격이 다르다. <태왕사신기>는 광개토태왕이라는 인물의 일대기를 그릴 작품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24부작은 너무도 짧다는 느낌을 결코 지울 수 없다. 자칫 광개토태왕의 일대기를 제대로 담지 못하고 일부를 조명하는 데 그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낳게 하는 대목이다.


표절 논란을 완전히 잠재울 수 있을까?

 

<태왕사신기>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표절 논란에 휩싸였던 드라마이다. 인기 만화 <바람의 나라>의 작가인 김진씨는 <태왕사신기>가 자신의 작품을 표절했다고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김진씨의 말에 따르면 <태왕사신기>의 시놉시스가 작품의 줄거리와 패턴, 신시의 개념 사용, 사신(四神) 캐릭터 사용 등의 측면에서 볼 때 <바람의 나라>와 흡사한 점이 많다고 하였다.


그러나 재판부는 "두 저작물은 개략적 줄거리와 캐릭터 성격에 있어 일부 유사점이 있지만 원고 김진씨의 작품은 단행본으로 출간된 완전한 형태의 만화인 반면 피고 송지나씨의의 시놉시스는 최종 저작물이 아닌 앞으로 저술할 드라마 시나리오 개요를 정리한 것으로 '실질적 유사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말로 송지나씨의 손을 들어주었다.


표절 논란은 이렇게 하여 일단락되었지만 재판부의 판결은 만화와 시놉시스의 비교하였을 뿐이므로 완성된 드라마가 방영된다면 또 다시 표절 논란이 고개를 들 여지는 얼마든지 남아 있어 우려가 되고 있다.

 

역사 고증, 제대로 되었나?


 
역사 왜곡 논란을 불러일으킨 <태왕사신기>의 의복
ⓒ MBC
 

최근 몇몇 사극들이 이른 바 '퓨전사극'을 표방하면서 역사에 대한 고증을 무시한 채 드라마를 제작하여 역사 왜곡 논란을 낳고 있다. <태왕사신기> 역시 정통사극이 아닌 퓨전사극이기 때문에 이런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실제로 지난해 9월 스틸컷이 공개되자 타이틀롤인 배용준의 갈색 염색 머리와 온라인 게임 캐릭터를 연상시키는 두꺼운 갑옷을 두고 역사 왜곡 논란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광개토대왕의 머리가 갈색이란 설정과 두툼한 철판을 이어붙인 듯한 갑옷에선 역사 고증의 흔적을 전혀 찾아보기 어렵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실제 고구려 갑옷은 비늘같은 쇳조각을 촘촘히 이어붙여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 산성에 대한 고증 면에서도 <태왕사신기>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태왕사신기>는 막대한 제작비를 바탕으로 중앙아시아 키르키즈스탄에서 드라마의 상당 부분을 촬영하였다. 그러나 그 지역에는 고구려 산성이 아닌 평지 성이 있을 뿐이기 때문에 여타 다른 고구려 사극처럼 논란에 휩싸일 여지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중앙아시아 키르키즈스탄에서 촬영된 모습
ⓒ MBC
 

 

고구려 사극의 중복, 흥행에 문제 없을까?

 

2006년 <주몽>을 시작으로 우리나라 사극은 '고구려 붐'이 일어났다. <주몽>에 이어 <연개소문>(연출 이종한 극본 이환경)이 고구려 사극의 바통을 이어받았고 <대조영>이 그 뒤를 이어 여전히 인기리에 방영 중이다.


그러나 요즘 들어 고구려 사극이 너무 오래 방영되어 시청자들이 다소 식상해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시대 사극으로의 회귀가 이어지고 있다. 최근 방영되거나 방영 예정인 사극인 <왕과 나>(연출 김재형 손재성 극본 유동윤)와 <이산>(연출 이병훈 김근홍 극본 김이영), <대왕 세종>(연출 김성근 극본 윤선주) 등이 조선시대로의 유턴을 이끌고 있는 작품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또 다시 고구려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태왕사신기>의 방영은 흥행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방송계에는 시청자가 선호하는 트렌드라는 것이 있는데 지금 <태왕사신기>는 그 트렌드에 역행하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일본 자금 유입설에 대한 찜찜함, 불식시킬 수 있을까?

 

 
<태왕사신기>에서 광개토태왕 역을 맡은 배용준
ⓒ MBC
 

<태왕사신기>에는 앞서 말했듯이 천문학적인 제작비가 든 작품이고 그 액수는 430여억원 정도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일본 자금이 유입된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고 있다.


이런 소문에 대해 제작사인 김종학프로덕션에서는 제작비로 일본 자본이 유입됐다는 것은 잘못된 이야기라고 하면서 국내 금융권과 개인 투자자를 통해 조성된 것과 일본에 <태왕사신기> 관련 컨텐츠를 선판매하여 자금을 모았다고 밝힌 바 있다. 일본에서 제작비를 투자받은 게 아니라 순수하게 <태왕사신기>를 미리 수출하여 번 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전 여류 비행사 '박경원'이라는 인물의 삶을 그렸던 영화 <청연>(감독 윤종찬)이 지금의 <태왕사신기>와 비슷한 논란에 직면한 적이 있다.


온라인 상에서 네티즌들이 박경원이라는 인물의 친일 행적을 파헤쳤고 이것이 친일 영화라는 소문과 일본 자금 유입설로 번졌다. 결국 <청연> 관람 금지 운동까지 펼쳐지며 120억을 들인 대작은 흥행 참패를 하고 말았다.


물론 <태왕사신기>는 <청연>처럼 친일 행적이 있는 인물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에서 인기가 높은 한류스타 배용준의 출연 때문에 이런 소문이 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제작사 입장에서는 이런 소문이 결코 좋을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그 찜찜함을 하루 빨리 불식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태왕사신기>는 우리 민족의 최고의 영웅 중 한 명이라고 일컬어지는 고구려의 제 19대 태왕인 광개토태왕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이다. 그런 만큼 시청자들 역시 기대가 무척 클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여러가지 우려 속에서도 <태왕사신기>에 많은 관심을 보일 것이다. <태왕사신기>가 이런 우려를 보란 듯이 떨치고 흥행과 작품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데 성공할 수 있을지 다음주를 주목해보자.

-- 출처 : 오마이뉴스(www.ohmynews.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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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다할아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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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들른 프랜차이즈 문구점에 손가락만 한 플레이모빌들이 인테리어 소품으로 장식돼 있었다. 즐겨보던 드라마 주인공은 우울할 때면 레고가 쌓인 방에 틀어박혀 조립하고 뜯으며 마음을 풀었고, 인터넷 뉴스에서는 네덜란드 잔드부르트 해안에 갑자기 떠내려 왔다는 2.5미터 크기의 레고 사진이 떠돌며 ‘제2의 트로이 목마가 아닐까’ 하는 음모론이 제기됐다.

어린 시절 멋모르고 뚝딱뚝딱 갖고 놀던 레고나 어른이 돼서야 알게 된, 처음에는 레고라 착각했던 플레이모빌은 특유의 귀여움과 깜찍함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사회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보고 '키덜트 문화'를 운운하겠지만 컬렉터들은 레고며 플레이모빌을 모으는 것은 우표를 모으고, 음반을 모으는 것과 품목만 다를 뿐 같은 취미활동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들이 남다른 품목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있다. 호프만의 동화 <호두까기 인형>에서 클라라가 살아 있는 장난감들을 발견한 것과 같다거나, <트랜스포머>의 샘이 범블비를 얻은 것 같은 기분이라나. 보통의 품목보다 좀 더 생동감 있고, 하나의 새로운 생명체를 만나는 느낌이란다. 사람들 마음속에 침투한 이 조그만 녀석들의 궤적을 좇았다.

렛츠 ‘플레이’ 투게더!

이 둘의 매력은 한 마디로 ‘유희(play)’에 있다. 플레이모빌은 이 키워드를 아예 겉으로 드러내는 반면 레고는 속으로 품고 있는데, 살짝 비틀면 이내 ‘놀다’라는 뜻이 튀어나온다. 1932년 덴마크의 목수 올레 키르크 크리스티안센은 장난감을 만들다가 이름을 생각해냈는데, 바로 덴마크어로 ‘잘 놀다’라는 뜻인 ‘Leg godt’를 줄인 말인 ‘레고’가 그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레고는 1958년에야 지금의 형태를 띠게 됐고 점차 놀이도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친구들인 바비 인형이나 양배추 시리즈 혹은 비행기 모형과 함께 어린아이들의 필수 장난감이 됐다.그에 비해 플레이모빌은 조금 생소하다. 80년대 잠깐 수입됐다가 중단돼 최근까지 소수의 컬렉터들만이 취급해왔기에, 낯설게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독일에서 만들어진 플레이모빌은 1974년 국제 토이페어에서 처음 선보인 이후로 30년 이상을 아이들에게 사랑받아온 국제적인 장난감이다. 심지어 고작 7cm에 불과한 이 피겨들의 생산량이 손을 서로 잡아주면 지구 두 바퀴는 너끈히 돌 정도다.

하지만 어린 시절 놀이도구로서의 추억은 두 장난감에 빠져들도록 만드는 초보적인 모티브에 불과하다. 컬렉터들은 오히려 어른이 돼서 느끼는 색다른 놀이로서의 매력이 더 크다고 말한다. 어렸을 적에는 무작정 블록을 쌓고 인형놀이를 하며 장난감 본연의 기능을 충실히 즐겼지만 어른이 돼서 하는 놀이는 좀 다르다. 정교한 생김새와 다양한 시리즈를 보며 그 다채로움에 감탄하고 자신의 컬렉션을 채우는 귀중한 전시품으로서의 매력도 알게 된다. 이른바 그들에게 이 장난감들은 전시 놀이로서의 ‘유희’다.

레고와 플레이모빌은 다르다?

쭉 진열된 레고 피겨와 플레이모빌 피겨가 있다면 사람들은 과연 잘 구별해낼까? 알고 보면 확연히 다르지만 플레이모빌을 이제야 접하게 된 사람들은 혼동하기 마련이다. 일반적 레고 피겨는 노란 얼굴과 통짜몸매, 짤막한 팔다리, 똑같은 크기를 유지해 구별이 어렵지 않지만 요즘 생산되는 특정 레고 피겨들은 크기나 색, 형태에 있어 자유로워져 플레이모빌과 일견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이럴 때 확실히 구별하려면 일단 피겨의 발바닥을 보면 된다. 레고는 기본적으로 블록인 반면 플레이모빌은 하나의 독립된 모빌이다. 레고의 발바닥에는 레고 블록의 특성을 그대로 반영한 결합구조가 있다. 흡사 문어의 빨판처럼 생겨 피겨를 레고 블록에 세울 수 있고, 레고 블록끼리 결합시켜 여러 가지 다른 모양체를 만들 수도 있다. 그래서 특정한 성이나 해적선 시리즈를 사더라도 창의성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모양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게 레고다. 반면 플레이모빌은 피겨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일반적인 레고 피겨보다 좀 더 정교한 사람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를테면 눈, 코, 입은 그린 것이 아니라 상감청자에서 문양이 그러하듯 다른 색의 재료를 이목구비의 틀에 짜 맞춰 끼우는 사출법을 택한다. 덕분에 지워질 염려가 없어 좀 더 정교한 장난감이 되는 것이다. 발바닥에는 빨판 문양이 없으며 대신 신발 끈과 굽이 표현된 정교한 신발이 신겨 있고 블록이 아니므로 세우기 위해서는 균형을 맞춰줘야 한다. 또 플레이모빌의 집이나 건물에서는 블록형 결합구조가 없어서 부순 뒤 아예 다른 형태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아기자기한 완제품으로써 소장하기 위해 여자들이 더 선호하는 것이 플레이모빌이다. 반대로 레고 컬렉터의 대부분은 남자다. 이들은 뜯고 또 짓고, 마음껏 변형 가능한 레고의 특징을 높이 산다. 특히 성 시리즈나 해적선 시리즈들은 인기 품목이다.

레고와 플레이모빌은 같다?

하지만 두 장난감이 표현해내는 세상은 많이 닮아 있다. 원래 플레이모빌은 실생활을 그대로 재현한 시리즈에 집중하고 레고는 특별한 테마 위주의 상품을 만들었지만, 요즘 두 장난감의 행보는 유동적이다. 플레이모빌은 빅토리안 시리즈를 비롯해 동화 시리즈 등 소장가치가 높은 제품들을 만들어냈고 레고 역시 경찰서나 소방서 등의 일상적인 공간은 물론이고 <해리 포터>나 <스파이더맨><스타 워즈> 등의 영화가 나올 때마다 테마 시리즈를 추가했다. 또한 PC와 연결하는 ‘마인드스톰’이나 로봇 시리즈인 ‘바이오니클’을 출시하면서 사업을 다양화하기도 한다. 그러는 동안 생산된 장난감들은 하나의 세상을 만들었고, 장난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테마파크를 통해 좀 더 사람들이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꾸며졌다. 레고 사는 1968년 덴마크에 최초의 레고랜드를 개장했고 온통레고 블록으로 이뤄진 미니어처 타운을 선보였다. 지금까지 캘리포니아와 독일, 영국까지 총 4개의 지역에 레고파크가 있으며 1999년에는 우리나라의 경기도 이천이 레고랜드 부지로 언급되기도 했다. 한편, 플레이모빌의 테마파크인 '펀파크'는 아직은 독일과 미국 두 곳이 전부다.

어쨌든 레고랜드든 펀파크든 수많은 레고와 플레이모빌이 가득한 환상의 세계임은 틀림없다. 아이들은 무수한 장난감을 통해 세상 곳곳을 먼저 볼 것이며 어른들 또한 한차례 추억에 잠기거나 별천지를 체험할 것이다. 그곳이라면 밤이 돼 장난감들이 살아 움직이거나 범블비처럼 나쁜 무리들을 처단해주는 환상이 이뤄질지도 모르겠다. 그런 꿈이 이뤄진다면 아니 그냥 상상할 수만 있다 해도, 레고든 플레이모빌이든 언제나 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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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고와 플레이모빌, 여기서 만나요

희귀 아이템부터 신제품까지 레고와 플레이모빌을 오프라인으로 만날 수 있는 곳을 소개한다. 마음껏 구경하시라.

토이뮤지엄

지난 4월 개관한 이곳은 레고와 플레이모빌 두 장난감만으로 가득 찬 박물관이다. 관장 이주학 씨는 10년간 모아온 레고와 플레이모빌을 2층 규모의 전시장에 꺼내놓았다. 2층에서는 블록과 조립완구들을 원하면 직접 체험학습 할 수 있으며 정기적인 놀이 프로그램도 있다. 매주 화요일에서 일요일까지 평일은 6시, 주말은 9시까지 연다.

위치 건대입구역 2번 출구 | 입장료 5,000원 | 문의 02-465-5137

인조이 플레이모빌

'천소'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 이정현 씨의 작업실 겸 전시공간 겸 판매처다. 빈티지 아이템을 좋아하는 그가 해외 사이트를 두루 둘러보며 구매한 진귀한 녀석들이 많다. 플레이모빌 외에도 다양한 미니어처와 피겨를 보유하고 있으며 빈티지 아이템을 위주로 판매도 겸한다. 매주 토요일 방문할 수 있다.

위치 합정역 3번 출구 | 문의 02-3141-3337

토이룬

건대 입구에 있는 또 하나의 플레이모빌 가게. 국내의 두 수입처 중 한 곳으로 매장을 연 지 채 1년이 안 됐다. 가게 안을 채운 플레이모빌도 주로 신제품 위주다. 크기 따라 제품 따라 가격도 천차만별이며 국내에서는 보기 힘든 관련 책자도 보유하고 있다. 매일 11시까지 연다.

위치 건대입구역 2번 출구 | 문의 02-467-3817

-- 출처 : 네이버 뉴스(www.nave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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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대전과 성남의 삼성하우젠 K리그 2007 20라운드 경기는 홈팬들에게 두고두고 아쉬울만한 경기였다. 대전은 우승후보로 꼽히는 성남을 상대로 잘 싸우고도 석연치 않은 판정 논란으로 결승골을 내주며 무너졌다. 결승골 이전까지 사실상 대전이 주도권을 잡아나가던 분위기였기에 아쉬움은 클 수밖에 없었다.

자칫 판정 논란 속에 모두 묻힐 뻔했지만, 정작 이날 대전은 불운한 결과 속에서도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다는데 충분히 위안을 삼을만했다. 바로 오랫동안 기다려온 '풍운아' 고종수(29)의 부활을 바로 눈앞에서 확인했기 때문이다.


'앙팡테리블', 대전에서 새로운 축구인생 시작


 
▲ 대전 시티즌의 고종수.
ⓒ 대전 시티즌
 

한때 '앙팡테리블(프랑스어로 무서운 아이)'이라는 닉네임으로 불리던 한 소년이 있었다. 1996년 수원 삼성의 창단 멤버로 처음 이름을 알린 이 작은 체구의 고졸 신인은 일약 팀을 K리그 정상으로 끌어올리며 프로축구계에 '무서운 아이' 신드롬을 일으켰다.


같은 해 비쇼베츠 감독이 이끌던 올림픽대표팀에 최연소로 발탁되어 곧장 주전 플레이메이커 자리를 꿰찼으며, 차범근 성인 대표팀 감독의 눈에 들어 98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지역예선에 합류했으며, 본선에서도 멕시코, 네덜란드, 벨기에와의 조별예선 3경기에 모두 출장하는 등, 엘리트 코스를 거쳤다.


K리그의 르네상스기로 꼽히던 90년대 후반에서 2001년까지는 그야말로 고종수의 전성시대이기도 했다. 당시 포항의 이동국, 부산의 안정환과 더불어 한국축구 '신세대 트로이카'로 꼽히던 3인방은 출중한 실력과 개성, 뛰어난 스타성을 겸비하며 K리그를 대표하는 스타로 자리매김했었다.


그로부터 어느덧 6년의 세월이 흘러 2007년, 고종수가 돌아왔다. 무릎부상으로 2002 월드컵 엔트리에서 탈락한 이후, J리그에서의 실패와 오랜 재활로 인한 후유증, 사생활을 둘러싼 논란과 잦은 돌출행동으로 그는 '문제아'라는 멍에를 쓰며 잊혀졌다. 팬들의 기억 속에 고종수는 더 이상 '앙팡테리블'이 아닌, 어른이 되기를 거부한 피터팬으로 남았다.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무적 선수 신분으로 방황한 지 일 년 반, 고종수는 어느덧 우리 나이로 서른의 문턱에 접어들며 이제는 성숙한 남자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자신을 오늘날 스타로 키워준 옛 은사의 품안에서, 그때 그 소년은 다시 어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김호 감독이 대전의 지휘봉을 잡은 후반기, 8월 1일 부산과의 컵대회 16강전을 통해 복귀 신고식을 가진 고종수는 팀 내에서 꾸준히 '조커'로 출전기회를 잡아가고 있다. 정규리그에서는 지난 12일 포항 전을 시작으로 최근 팀이 소화한 6경기 중 4경기에서 교체멤버로 출전했다.


한 박자 빠른 패스와 넓은 시야, '여전하네'


2일 경기에서 김두현의 선제 골로 성남에 0-1로 끌려가던 후반 5분, 김호 대전 감독은 고종수를 예상보다 빨리 투입했다. 추가시간을 포함하여 이날 약 43분 출장은 고종수가 올 시즌 가장 많은 시간을 소화한 경기였다.


'양뿐 아니라 질'에서도 고종수의 활약은 근래 들어 가장 돋보였다. 투입되자마자 고종수는 후반 10분 페널티 에이리어 오른쪽에서 기습적인 중거리슈팅을 날리며 가벼운 몸놀림을 보여줬다. 경기의 흐름을 파악하고 상대의 타이밍을 빼앗는 고종수 특유의 템포축구가 돋보이는 장면이었다.


체력적으로 아직 부족한 만큼 1대 1 상황에서 날카로운 돌파를 보여준다거나 빈 공간을 파고드는 것처럼 운동량을 필요로 하는 플레이는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나 플레이메이커로서 한 박자 빠른 패스와 넓은 시야를 통해 동료들에게 수차례 공격의 활로를 만들어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 이날 동점골을 넣은 데닐손과 함께 보여준 콤비플레이가 인상적이었다. 개인기와 돌파력이 좋은 데닐손이 활발한 움직임으로 공간을 창출하면 고종수가 한 박자 빠른 패스로 지원하거나 다른 동료들에게 찬스를 만들어주는 식의 플레이가 이날 계속됐다. 후반 대전의 공격은 대부분 고종수-데닐손을 중심으로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종수는 이날 수비에도 의욕을 보였다. 전성기 시절의 고종수는 수비 부담이 많은 역할이 아니었고, 스스로도 수비 가담에 그리 적극적인 선수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날 고종수는 팀 사정상 민첩하지는 못했지만 하프라인을 몇 차례 왕복하며 수비를 지원하고 몸을 날려 공중 볼을 따내는 등 강한 투지를 선보였다. 재기에 대한 선수의 집념을 읽을 수 있었던 대목이다.


아쉽게도 고종수에게 복귀 이후 처음으로 승리의 주역이 될 수도 있었던 이날 경기는, 후반 40분 터진 김동현의 결승골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모두가 인정 할 수 있는 실점이 아니라, 성남의 프리킥이 판정 논란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안타까울 일이다.


고종수는 경기가 끝난 후 굳은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빠져나갔다. K리그 복귀이후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준 하루였음에도 운이 따르지 않았다. 경기의 스포트라이트는 이날 스스로 승부를 결정지어버린(?) 심판의 멋쩍은 모습과, 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에게 달려든 어느 대전 구단 임직원과의 몸싸움, 그 위로 날아오르던 관중들의 '분노의 물병(?)' 속에 가려졌다.


만일 이날 대전이 승리하거나 혹은 비기기만 했더라도 오늘의 주역은 고종수가 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팬들은 고종수를 결코 잊지 않았다. 이날 고종수가 보여준 화려한 부활과 김호가 이끄는 대전의 가능성에 대전 팬들은 환호하며 따뜻한 격려의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오늘 졌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고종수에게도, 대전에게도, 재기는 이제 시작일 뿐이니까.

-- 출처 : 오마이뉴스(www.ohmynews.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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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시작된 SBS 드라마 <왕과 나>.
ⓒ 김종성
 

최근 시작된 SBS 드라마 <왕과 나>에 나타난 내시는 독자적 이해관계를 구축하면서 왕권을 위협하는 이미지를 띠고 있다. 중국에서는 내시 대신 환관이라는 표현이 주로 사용되고 있다.


1, 2회에서는 세조에 이어 새로 즉위한 예종이 집권 초기부터 내시부 개혁에 착수하자, 이에 맞서 판내시부사 조치겸(전광렬 분)이 왕권에 맞서 활로를 모색하는 장면이 방영되었다. 물론 드라마에서 말이다.


<왕과 나>에 전형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은 내시를 '궁중에서 왕권을 위협한 존재'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중국역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환관의 폐해'니 '환관의 농간'이니 하는 표현이 그런 인식을 더욱 더 부채질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내시제도가 본래 어떤 정치적 기획 하에서 출발한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내시가 왕권을 위협했다는 일부의 통념이 그리 근거가 없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사실, 내시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인식은 다분히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형성된 측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시제도가 왕권과 관련하여 어떤 기능을 갖고 있었는가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유용한 사례가 있다. 그것은 바로 오스만제국(1299~1922년)의 궁정노예제도다.


2001년에 이하라 히로시가 짓고 벤세이출판사(일본)가 펴낸 <지식인의 제상>에 실려 있는 스즈키 다다시(도쿄대 동양문화연구소) 교수의 '오스만제국에 있어서 지(知) 및 권력의 담당자와 정치과정의 변용'이라는 논문에는 과거 오스만제국의 왕들이 궁정노예를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오스만 궁정에 있던 노예신분의 남자들은 동아시아의 내시와 '신분적’으로 다를 게 별로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오스만제국의 궁정노예들이 거세를 했는지에 관해서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오스만제국의 궁정노예들이 내시와 같았다는 말은 '신체적'으로 그렇다는 게 아니라, 궁궐에 사는 왕의 남자 노예라는 '신분적' 조건이 같다는 의미다. 


술탄(오스만제국 군주) 전제정치가 확립된 15세기 후반부터 오스만제국의 통치구조에는 특이한 현상이 나타났다. 군주 전제정치가 확립되었으니 술탄이 전면에 나섰을 법한데, 도리어 술탄은 뒤로 물러나고 엉뚱한 제3자가 권력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그 제3자라는 것은 술탄의 절대적 대리인으로서의 영향력을 가진 대재상(국무총리)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대재상들의 대부분이 귀족이나 관료 출신이 아닌 궁정노예 출신이었다는 점이다. 한국이나 중국식으로 표현하면, 내시 혹은 환관들이 국무총리를 맡은 셈이다.


오스만제국의 술탄들이 궁정노예에게 대재상을 맡긴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이는 그만큼 술탄의 권력이 귀족의 권력을 능가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이러한 제도를 통해 술탄들이 자신의 정치적 책임을 절대적 대리인인 대재상에게 떠넘기려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아무런 권력기반이 없는 궁정노예에게 대재상직을 맡김으로써 대재상의 권력이 강화되지 못하도록 하는 동시에, 귀족들의 권력도 견제하고 술탄 자신의 권력도 강화시킬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처럼 전제정치가 확립된 15세기 후반부터 오스만제국의 술탄들은 자신의 측근인 궁정노예들을 권력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귀족들을 견제하는 한편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


 
창경궁 명정전에 있는 보좌. 내시는 보좌를 위협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를 보좌하는 존재였다.
ⓒ 김종성
 

한국과 중국의 내시제도도 유사한 취지를 갖고 있었다.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취지에서 남자 노예들을 궁궐에 두었던 것이다.


전통시대에 군주는 기본적으로 백성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군주는 귀족의 압제로부터 백성을 보호하는 '호민관'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군주가 귀족들과 한패가 되어 백성을 압제한 사례는 잘 발견되지 않는다.


천명사상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동아시아의 군주들은 기본적으로 천(天) 즉 민(民)에게 권력의 정통성을 두고 있었고, 이러한 이념에 따라 동아시아에서는 군주와 귀족 사이에 일종의 이념적인 대립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에 왕권과 재상권 사이에 대립이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백성에게 권력의 정통성을 두었다고는 하지만, 귀족세력과 대립하고 있는 군주는 본래 외롭고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랬을까? 왕실이 있다고는 해도 수적인 면에서 군주는 귀족세력에게 밀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주 편이라 할 수 있는 백성은 멀리 있고 군주의 대립자인 귀족은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백성에게는 별다른 사회적 권력(경제력·군사력·정보력)이 없지만, 귀족에게는 그런 무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백성은 조직화되어 있지 않지만, 귀족은 비교적 조직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군주는 귀족과의 대결에서 고독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군주에게는 또 다른 '힘 있는 남자'들이 필요했다. 그들이 바로 내시이고 환관이었다.


내시를 '힘 있는 남자'라고 하니까, 표현이 좀 어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시들은 정말로 힘 있는 남자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군주의 통치를 보조하는 데에 필요한 여러 가지 기술적 지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군주를 보좌하도록 훈련받은 사람들이었다.


군주의 입장에서 볼 때에, 충성스러운 관료보다는 충직한 내시가 더 믿을 만한 존재였을 것이다. 동아시아 전통시대의 관료들은 대개 귀족이나 사대부 출신의 유교적 지식인들이었다. 그런데 유교 이론은 신권(臣權)보다는 왕권을 제약하는 측면이 더 컸다. 폭군방벌론이 그것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관료가 아무리 충성스러울지라도 그 역시 언제 돌변하여 "폐하, 아니 되옵니다!"를 외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귀족이나 사대부 출신의 관료인 경우, 군주의 정책이 자기 집단의 이익을 침해한다고 판단되면 "금상(今上)에게서는 천명이 떠났다"며 반기를 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에 반해, 내시들은 달랐다. 그들은 신체의 특정 부위만 없는 게 아니라, 군주가 보기에 '더 중요한 그 무엇'도 없었다. 그것은 바로 군주의 권력을 위협할 만한 사회적 권력이었다. 대개 가난하거나 미천한 집에서 태어난 사람들인데다가 어려서부터 군주만 쳐다보면서 살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내시들에게는 군주를 위협할 만한 사회적 무기가 별로 없었다.


또 궁녀와 비교할 때에, 그들은 군주에게 사심을 가질 만한 이유가 별로 없는 사람들이었다. 궁녀들은 군주에게 성적 욕구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궁녀들의 충성심은 남녀관계가 그렇듯이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시들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없었다. 


또 왕실의 남자 구성원들과 비교할 때에도, 내시들은 군주가 신뢰할 만한 존재였다. 왕이 아닌 남자 왕족은 왕의 자리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내시들은 그럴 가능성이 없으므로 왕이 의심할 이유가 별로 없었다.  


그리고 내시들은 군주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을 최고의 가치로 배운 사람들이기 때문에, 군주가 설령 실정을 저지른다 해도 군주를 배반할 가능성이 낮았다. 군주가 귀족의 이익을 침해한다 해도 그렇고 또 설령 군주가 백성의 이익을 침해한다 해도, 내시들은 어디까지나 '왕의 남자'들일 뿐이었다.


바로 이러한 충성스러운 내시들이 있었기에 동아시아 군주들은 귀족이나 사대부와의 대결에서 힘의 균형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그들이 없었다면, 군주가 귀족이나 사대부를 억누르고 애민정책을 펴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애민정책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백성을 위하는 정책인데, 이런 정책을 펴다 보면 자연히 귀족이나 사대부의 이익을 침해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과거에 합격한 관료들이 왕의 정책을 수용할 가능성이 낮아지게 된다.


평소에는 충성스럽던 신하도 막상 자기 집단의 이익을 침해하는 정책이 시행되면 '천명이 떠났다'면서 자신의 변절을 합리화할 가능성이 있다. 이런 경우에 왕이 속마음을 터놓고 '작전'을 의논할 대상은 유능한 내시들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동아시아의 내시는 본질적으로 군주와 귀족의 대결에서 군주의 권력을 보조하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들의 존재는 기본적으로 군주의 애민정책에 긴요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군주나 백성의 입장에서는 내시를 적대시할 이유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

 
구중궁궐 같은 중국의 자금성. 환관(한국의 내시)들은 이곳에서 평생 황제만 바라보면서 살 수밖에 없었다.
ⓒ 김종성
 

"그렇지만, 내시들이 군주를 독살하고 부정부패를 일삼은 사례가 많지 않으냐?"고 질문할지 모른다. 그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내시들이 군주를 독살한 경우에도 그것은 또 다른 '차기 군주'와의 모의 하에 그렇게 한 것이지, 아무런 배경도 없이 그런 짓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그런 경우에도 그들은 기본적으로 '왕의 남자'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귀족이나 사대부 편을 든다면, 그 순간부터 그들은 존재의 의의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존재의의는 귀족이나 사대부와의 대결에서 군주를 보조하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시들이 뇌물을 받고 매관매직을 하는 등 부정부패를 일삼은 사례에 대해서도 좀 더 숙고가 필요하다. 내시가 판치고 다니는 세상은 그만큼 귀족 혹은 사대부가 기죽어 사는 세상이다. 그리고 귀족이나 사대부가 기죽은 시대는 바로 군주의 권력이 왕성한 시기다.


오스만제국의 사례에서 언급한 것처럼, 술탄의 권력이 전성기일 때에 궁정노예들이 전면에 등장했다. 이것은 자신의 수하들을 권력 전면에 내세워도 좋을 만큼 군주의 권력이 강화되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한국이나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내시들이 판치고 다닌다는 것은 그 뒤에 군주의 비호가 있으며, 또 그렇게 해도 될 만큼 군주권력이 강화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군주와 귀족(혹은 사대부)의 대결에서 군주권이 상대적으로 강화되어 군주를 견제할 사회세력이 약화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군주와 귀족이 팽팽하게 대립할 때에, 군주는 백성을 자기편으로 만들려 한다. 하지만, 귀족에 비해 압도적 우위를 점한 상태에서는 굳이 백성에게 기대려 하지 않는다. 그런 경우에 군주는 자신의 비대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불법자금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군주가 직접 나서서 부정한 돈을 거둘 수 없으니, 그 수하들인 내시가 나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시들이 부정부패를 일삼고 권력을 전횡하는 상황은, 실제로는 군주가 그 배후에 있었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아무 배경도 없는 내시들이 군주와 귀족 양편을 동시에 억압하고 그 같은 부정부패를 일삼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어느 한 쪽이 내시를 비호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귀족들은 내시를 비호하지 않으니, 군주가 그 배후에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내시들이 부정부패를 저질렀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문자 그대로 믿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귀족 관료나 사대부 관료와 달리 내시들은 본래 재산을 축적할 이유가 별로 없는 사람들이다. 인간의 욕심은 대개 성욕이나 가족 때문에 생기는 것인데, 그런 것이 없는 사람들이 불법 재물을 얻기 위해 정치적 모험을 감행했으리라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물론 내시들마다 개인차는 있었겠지만, 그들은 기본적으로 큰 욕심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군주가 그들을 기용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치적으로 볼 때에 내시의 부정부패는 분명 왕의 부정부패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에는 내시의 부정부패라고 기록되어 있다면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될 수 있을 것이다.


오스만제국의 술탄들이 궁정노예를 대재상으로 내세운 이유 중의 한 가지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신의 정치적 책임을 노예에게 떠넘기기 위해서다. 대통령제 국가인 한국에서 총리라는 '이상한 제도'를 두고 있는 데에도 유사한 이유가 작용하고 있다. 헌법학자들의 지적처럼, 총리를 '방탄용'으로 쓰려는 목적이 부분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내시들이 직접 나서서 불법 재물을 모으는 것은, 대개의 경우 군주의 비호나 지시 하에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군주가 비밀 정치자금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에 내시들이 나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경우 내시들이 주범이라고 역사에 쓰여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보스를 위해 정치자금을 수집한 보스들이 검사 앞에서 자신의 단독 범행이라고 우기는 경우와 별로 다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내시들에게 불리한 기록이 역사에 남는 것은 그들의 신체조건으로 볼 때에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역사에 긍정적으로 기술되려면, 후손들의 지위가 든든해야 한다. 군주나 귀족들에게는 그런 후손들이 있다.


하지만, 내시들에게는 양자 외에는 후손들이 없다. 훗날 자기 조상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역사 기록을 정정해달라고 요구할 후손들이 그들에게는 없는 것이다. 내시가 역사에서 부정적 이미지로 남는 데에는 이처럼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또한 내시를 비호해줄 지식인 같은 사회세력이 없기 때문에 역사에는 그들에게 불리한 기록이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어쩌면 역설적으로 그들의 청렴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해서 자기편을 만들지 않았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해서 내시들은 정말로 불쌍한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남자 구실을 못해서가 아니다. 평생 군주에게 충성하면서도 때로는 군주의 잘못까지 대신 뒤집어쓰고 그것도 모자라서 두고두고 역사에서 '나쁜 놈'으로 기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내시는 본질적으로 군주의 정치권력에 보탬이 되는 존재였는데도 오늘날에는 왕을 위협하던 존재로까지 묘사되고 있으니, 그들은 어디 가서 이 억울함을 호소해야 할까? 그들의 후손을 남길 단서는 '항아리'에 들어가고 없으니, 어느 누가 나서서 그들의 한을 풀어줄까?

-- 출처 : 오마이뉴스(www.ohmynews.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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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다할아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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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피프린스 1호점>
ⓒ mbc
"너 좋아해. 네가 남자건 여자건 외계인이건 이제 상관 안 해. 갈 때까지 가보자."

지난 27일 막을 내린 MBC 월화드라마 <커피 프린스 1호점>(극본 이정아, 장현주, 연출 이윤정)에서 고은찬(윤은혜)이 남자인줄 아는 최한결(공유)이 말했다. 이토록 자신을 내버리는 비장한 사랑 고백에 뭇 여성들이 쓰러졌다. 사랑으로 아무것도 따지지 않겠다다는 순간이었고, 한결이 '남자', '여자'라는 고정관념도 던져버리겠다는 순간이었다.

물론 시청자들은 처음부터 은찬이 여자인 줄 알았다. 그건 시청자와 제작진이 쳐놓은 약속이자 그물망이었다. 그렇게 은찬을 남자로 알면서도 끌리는 마음에 어쩔 줄 모르는 한결을 보며, "은찬이 여자야"라고 한결에게 말해주고 싶어 근질거리는 입을 꾹 다물고, 시청자들은 은찬과 비밀을 공유하며 <커피 프린스 1호점>(이하 <커프>)와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그게 다였을까?

<커프>는 사실 뻔한 로맨스 틀 안에서 뻔한 로맨스를 뻔하지 않게 다뤘다. 커다란 줄거리야 그 동안 숱한 로맨스 드라마와 다를 게 없었다. 어찌 보면 뻔했다. 재벌2세와 가난하기 그지없는 데다 24시간 일해야 먹고 사는 '소녀 가장'의 사랑이야기였다. 거기다 숱한 드라마들이 우려먹은 '깜짝 파티'도 끼워 놓았다. 한결이 남자로 알고 있는 고은찬은 알고 보니 여자였고, 한결은 알고 보니 친자식이 아니었다.

그런데 뻔하지 않았다. 달랐다. 신선했다. 왜 그랬을까? 단순히 화면이 예뻐서? 물론 화면은 예뻤고, 독특한 음악이 딱 맞는 순간에 휘감았다. 감각 있는 연출은 어떤 드라마보다 돋보였고, 개성 있는 꽃미남 조연들도 예뻤다. 연기인지 실제인지 모르게 배우들은 즐겁게 화면 속에서 놀았고, 그 에너지는 화면 밖으로 그대로 전달됐다.

하지만 <커프>는 달랐다. 연애에 대처하는 남자 여자의 자세가 달랐고, 남자와 여자를 바라보는 여자, 남자의 자세가 달랐다. 이 드라마가 보여준 남자와 여자는 여느 드라마에서 흔히 보던 남자와 여자가 아니었다. <커프>에선 남자가 여자 같았고, 여자가 남자 같았다. 하지만 아무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물처럼 흘렀다.

이런 여자, 이런 연애 본 적 있나?

▲ 고은찬 역을 맡은 윤은혜와 최한결 역의 공유
ⓒ mbc
<커프>의 고은찬은 어떤 드라마에서도 볼 수 없던 여성 캐릭터였다. 명랑하지만 긴 머리를 날리지도 않았고, 순수하지만 여자답지 않았다. 되레 남자다웠다. 오죽하면 한결은 초반에 고은찬을 남자로 철썩 같이 믿었다. 그가 여자라고 말하기 전에, 그는 한결에겐 남자였다. 세상 시선에 익숙한 한결 눈에 고은찬은 영락없는 남자였다. 그건 은찬이 남자들만 하는 행동을 해서였다.

은찬은 짧은 커트 머리에 티셔츠를 걸쳐 입고 남자처럼 걷고 남자처럼 말했다. 피자는 여러 조각을 겹쳐서 한꺼번에 먹고, 자장면은 앉은 자리에서 서너 그릇은 너끈하게 해치웠다. 심지어 단무지로 자장면 그릇에 묻은 자장을 싹싹 긁어 먹으며 힘은 어찌나 센지 술 취해 쓰러진 한결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날랐다.

여자들 고유의 특권처럼 음식을 깨작거리거나 보이지 않게 입에 쏙 집어넣고 우물거리지도 않았고, 조금만 무거운 것 앞에서도 연약한 모습으로 쓰러지지 않았다. 고은찬은 여자가 하지 않을 짓만 골라했다.

<내 이름은 삼순이>가 뚱뚱하고 입이 거친 여자 캐릭터로 '로맨스' 드라마가 보여주는 여성 캐릭터에서 한 단계 나갔다면, <커프>는 아예 남자 같이 말하고 먹는 여성캐릭터로 서너 단계는 더 나간다. 그리고 그런 은찬을 한결은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

나풀나풀 긴 머리를 나부끼며 여성스럽기 그지없던 유주를 좋아하던 한결이 문득 정반대로 남자 같은 은찬을 사랑한다. 남자로 알면서 사랑하고, 은찬이 여자로 밝혀진 뒤에도 '여자답게' 바꾸라거나, '여자애가 그게 뭐니'로 은찬을 사회가 원하는 '여성형'으로 바꾸려하지 않는다. 이미 그에게 '여자답다'는 단어는 없다. 고은찬은 그냥 고은찬이다.

<커프>는 묻는다. 왜 고은찬 같으면 여자가 아닌데? 왜 사랑받지 못하는데? 여자답다는 게 뭔데? 남자답다는 게 뭔데?

어떤 왕자님 드라마에서도 여기까지 나아가진 않았다. 선머슴 같던 여자는 왕자님을 만나 변모했다. 미운 오리가 드레스를 입고 백조로 환골 탈퇴했다. 왕자는 공주차림으로 변신한 신데렐라와 사랑에 빠졌지, 향단이 차림 그대로인 무수리와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 현실도 그렇지 않은가?

근사한 미남이 척 보면 남자로 보이는데다 꾸역꾸역 먹는 먹보인 여자와 사랑에 빠질 확률은? 낙타가 바느질할 확률보다 희박했다. 그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게 아니라, 무에서 오이를 창조하는 일에 가까웠다.

하지만 <커프>는 '여자답다, 여성스럽다'란 개념을 조롱했다. 있는 건 여자답다가 아니었다. 그 사람다우면 됐다. 그래서 "은찬스럽다, 한결스럽다"였다. 여성, 남성 이전에 각 개인이 존재한다고 말없이 말했다.

청혼도 달라, 결혼도 달라

▲ 최한성 역의 이선균과 한유주 역의 채정안
ⓒ mbc
한성(이선균)과 유주(채정안)의 연애는 '아주 오래된 연인'이지만 '아주 오래된 연애' 방식과 달랐다. 다른 남자와 살다 돌아온 여자를 한성은 여전히 사랑했다. 그런 유주의 과거는 말하면 큰일 날 유리잔이 아니라, 툭하면 꺼내서 씹어댈 농담처럼 자리했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걸로 만들어버리며 그들은 지난 일을 넘겨버렸다. 그 남자를 만나기 전 '과거'로도 결혼이 뒤집히고 관계가 깨지기 일쑤인 여느 드라마나 여느 일상과 달랐다.

그리고 유주는 우연히 임신했다. 결혼은 꿈도 꾸기 전이었다. 보통 드라마에서 결혼 전에 임신한 여자들은 불안에 떨며 전전긍긍했다. 그리고 남자가 책임지지 않으면 어쩌나 싶어 전전긍긍하다 남자에게 말했다. 다들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임신했는데도 남자가 결혼해주지 않으면 불행하다고 외쳤다.

하지만 <커프>는 달랐다. 정반대였다. 임신이 문제가 아니라, 사랑이 문제였다. 내가 그와 결혼하고 싶은가? 아니라면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키울 수 있다고 살짝 내비쳤다. 싱글맘도 불사할 태세였다.

둘이 결혼을 결심하는 과정도 그랬다. 보통 청혼은 남자의 전유물이었다. 멋지게 반지를 준비하고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커프>는 그걸 멋지게 뒤집었다. 불현듯 무릎을 꿇은 건 유주였다. 프러포즈하는 말도 그랬다.

"별도 달도 따주겠다는 말은 못하겠다. 그리고 미안한데 찬 물에 손도 담그게 될 거야." 보통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하는 거라고 알려진 이 대사를 유주가 태연히 말했다. 그건 동반자적인 삶으로 초대처럼 보였다. 우리에게 굳은 여자와 남자관계가 경쾌하게 비틀렸다.

결혼식도 달랐다. 결혼식 날짜로 잡은 날, 한성의 부모가 바빠서 그 날 귀국할 수 없다고 알려왔다. 가족이 중요한 한국사회에서 보통 이럴 때 대답은 하나다. 결혼식 날짜를 미루고 부모가 모두 참석할 수 있는 날짜를 잡는 길이 유일했다. 결혼에서 중요한 건 당사자가 아니라 부모였다. 그러나 <커프>는 달랐다. 꼬장꼬장할 할머니조차 관례를 단번에 뒤집었다. "그것들 기다리다간 결혼 못해. 그냥 해." 갈등은 없었다.

부모가 참석할 수 없다는데도, 한국남자 한성은 되레 반색하며 반겼다. "저희야 그럼 좋죠." 그리하여 둘은 결혼하는 당사자 시간이 우선인 결혼식을 올렸다. 한국 사회에서 특히 드라마에서 보기 드문 결혼식을 보여줬다. 부모 없는 결혼식을 본 적이 있나?

ⓒ mbc
<커프>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남녀관계에 관한한 어떤 드라마보다 전복적이다. 하지만 힘주지 않는다. 별 갈등 없이 아무렇지 않게 깬다. 상식처럼 알던 고정관념을 사뿐하게 즈려 밟고 건넌다.

한결이 바리스타를 꿈꾸며 제대로 공부하겠다는 은찬에게 말한다.
"네가 나 사랑해서 뭔가 포기하는 거 싫어. 내가 힘이 돼서 네가 더 성장하고 발전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힘은 여자가 주고, 성장은 남자가 하던 관계를 깬다.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사랑이란 이름으로 양보하고 희생하긴커녕, 서로가 서로를 떠받히며 성장하는 관계를 꿈꾼다. '내조'라고 일컬어지며 보통 여자가 말하던 대사를 남자들이 아무렇지 않게 한다. 그래서 별 수 없는 '한국 남자'라서 등장하는 갈등이 이들에겐 없다. 이들은 그냥 사랑하고, 그냥 성장한다.

<커프>야말로 틀에 박히지 않다 못해, 틀을 깨버리는 신선한 로맨스를 보여줬다. 어떤 드라마에서 이토록 고정관념 없는 사랑과 고정관념 없는 여자, 남자를 보여줬던가? 그것도 이처럼 유쾌, 상쾌, 통쾌하게?

그래서 <커프>는 여자가 꿈꾸는 판타지의 세계이고, 현실에서 결코 보기 드문 유토피아다. 어떤 남자들이 <커프>의 한결, 한성, 선기, 민엽, 심지어 홍사장, 정육점 아저씨처럼 순수하게 사랑할까?

-- 출처 : 오마이뉴스(www.ohmynews.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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