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태양이 나를 향해 눈부신 빛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빛은 수십 개로 늘어났다. 반짝이고 뜨거운 빛에 의해, 시야가 가려지고 몸이 서서히 메말라 가는 동안에도 나는 그 빛에 취해 있었다. 빛이 영원토록 내게만 비출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계속 그 빛을 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시야에서 빛이 사라졌다. 그런데 눈을 뜰 수가 없다. 내 앞에 있던 빛을 너무 오랫동안 봤기 때문일까? 결국, 눈이 멀고 내 몸은 완전히 말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다 예전에 비췄던 빛 중 유일하게 구분할 수 있었던 하얀빛이 보였다. 눈도 서서히 보였다. 옆과 뒤도 보였다. 빛을 처음 봤던 그때로 돌아간 것이다. 다시는 수많은 빛에 취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나는 한때 내 왼발로 모든 빛을 모이게 했던 고종수(29·대전 시티즌)다.


 
올 시즌 대전에서 부활한 '앙팡테리블' 고종수.
ⓒ 대전 시티즌

 

[#1. '축구천재'의 부활?] "말로 하면 뭐해요. 운동장에서 보여주면 되지"


지난 7일 오후 대전지하철 지족역 근처 한 커피전문점. 인터뷰를 위해 가게에 들어서자 막 나가려던 여성 손님이 그를 알아보고는 "고종수 잘 생겼다. 열심히 해요"라고 한마디 한다. 어색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좋은 말을 들어서 그런지 얼굴에는 미소가 번진다.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종업원의 주문 요청이 들어왔다. 그는 "달달한 것 없나요?"라고 묻더니 블랙커피를 시켰다. "설탕을 꼭 가져다 달라"는 주문과 함께.


문득 몸 관리라면 철저하다는 그의 선배 서정원이 생각났다. 서정원은 지난 7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 관련기사 바로가기)에서 '아이스 녹차'를 시켰었다. 그래서 물었다. '커피 마셔도 되냐'고. 그러자 별 걱정을 다 한다는 듯 한마디 던진다.


"TV에서 보니 하루에 커피 한 잔은 괜찮다고 하던데요.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영양학 교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고요. 커피 한 잔 정도야 별 지장 없을 것 같아요."


 
지난 7일 만난 대전의 고종수 선수.
ⓒ 이성필

그렇게 커피를 마주하고 이야기가 시작됐다.


올 시즌 고종수는 대전에 전격 입단했다. 그가 재기할 것이라 예측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공백 기간이 너무 길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서히 출전 시간이 늘어나고, 득점까지 하면서 고종수는 언론노출 빈도도 높아졌다. 게다가 그의 스승 김호(63) 감독이 대전을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는 기적을 보여주면서 그와 대전에 대한 축구팬들과 언론의 관심은 폭발적이었다.


"인터뷰를 자제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쉽지가 않더라고요. 구단에서도 그런 점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하는 것 같았고요. 그래도 팬들이 궁금한 점을 풀어줘야 한다고 생각해서 여러 인터뷰에 응했어요."


그와 인터뷰를 끝낸 뒤 대전의 연습경기가 열린 월드컵 보조구장에서 만난 구단 직원은 여전히 밀려들어 오는 인터뷰 요청을 조절하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에이전트인 AI스포츠 곽희대 대표 역시 마찬가지였다. 같은 질문에 같은 말을 반복해야 하는 어려움 때문인지 그는 더 이상 언론의 인터뷰 요청을 응하기 힘들다며 다음과 같은 말로 정리했다.


"(축구를) 잘 하지도 못하는데 말로 하면 뭐해요. 운동장에서 보여주면 되지. 운동선수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하면 될 것 같아요."


[#2. 수원과 그랑블루]  "겉으론 욕해도 마음 속으론 응원하지 않을까요?"


 
대전에서 다시 만난 김호 감독(왼쪽)과 고종수(오른쪽).
ⓒ 대전 시티즌

K리그에 첫 발을 내딛게 해준 수원 삼성 블루윙즈은 그와 뗄 수 없는 사이다. 1996년 만 열여덟의 어린 나이에 창단 멤버로 두 번의 정규리그 우승과 아시아 클럽 정상을 같이 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대표로 인연을 맺었던 차범근 감독과 2004년에도 만났다. 수원 서포터 '그랑블루' 역시 그와 같이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솔직히 수원 팬들은 늘 마음 구석에 자리하고 있어요. 종합운동장(수원월드컵경기장이 생기기 전 수원 홈 구장) 시절부터 같이 커왔잖아요. 지난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 때 반대쪽에서 그들(그랑블루)을 보게 됐는데 여전히 대단하고 멋있더군요."


그랬다. 지난 10월 14일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대전은 수원을 만나 1-0의 승리를 거뒀다. 경기 후 김호 감독과 고종수는 수원 팬들이 자리한 남쪽 관중석 앞으로 이동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이들에게 박수를 쳐주는 팬들도 있었고 야유를 보내는 팬들도 있었다.


"몇몇 팬들은 겉으로는 저한테 욕하고 그러시는 것 같던데 마음 속으로는 응원해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다고 제가 잘 보일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이제는 대전 팬들이 열렬히 응원해 주잖아요."


어느새 대전의 '자줏빛 전사'가 다 됐다. 여러 인터뷰에서도 대전 팬들의 열정을 높이 치켜세웠다. 대신 그는 한 가지 바람을 얘기했다.


"그랑블루 같은 서포터가 팀마다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면 선수들도 경기할 맛이 날 텐데요. 한쪽은 온통 빨갛고 다른 쪽은 새파랗고,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요."


2004년 J리그(교토 퍼플상가)에서 돌아와 FC서울과 입단 계약 직전까지 갔던 고종수는 수원으로 다시 돌아왔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팬들의 성원과 그리움이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팀 무단이탈과 음주 등으로 물의를 일으켰고 차범근 감독과의 사이도 벌어졌다는 소문까지 터져 나왔다. 결국, 구단은 그를 임의탈퇴 시켰다. 이때부터 그의 방황은 시작됐다.


"그때는 제가 정신이 나갔었나 봐요. 힘든 시기였고 모든 게 틀어진 것 같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전적으로 다 제 잘못이죠. 생각이 너무 짧았어요. 차 감독님과 안 맞는 것은 아니었어요. 단지 감독님의 선진적인 축구 사상을 제가 부족해서 못 따라간 것뿐이죠."


[#3. 지독한 부상] "신이 있다면 내가 뭘 잘못 했는지 묻고 싶어요"


 
고종수 선수의 미니홈피.
ⓒ 인터넷 화면 캡처

어느새 서른 문턱까지 다다른 고종수, 그의 개인 홈페이지에는 여러 가지 문구가 새겨져 있다. 그중에도 '사자는 아무리 배고파도 풀은 뜯지 않는다'는 상당히 인상적인 문구다. 자신을 사자에 이입시킨 것 같은 느낌의 문구에 대해 그는 "비굴하게 살지 않는 게 자신의 신조"라고 강조했다.


또 다른 문구도 있다. '실패라는 상처 위에 인내라는 약을 발라 노력이란 붕대를 감는다면 성공이라는 흉터가 남는다'라는 것이다. 지인이 어느 날 힘내라며 보낸 문구를 보고 난 뒤 '정말 내 인생 같다'는 느낌이 들어 늘 새겨놓고 있다고 한다.


"인생이란 게 그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잘할 때 연락하던 주변 사람들이 헤매고 있으니 알아서 연락을 안 하더군요. 요즘에서야 가끔 연락이 오는데 그러더라고요. '연락하려니 마음이 안 좋아서 그랬다'고들 하던데 뭐 괜찮아요. 이제 '축구천재'가 아닌 묵묵히 운동해서 기억에 남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2001년 8월, 수원 시절의 고종수는 전남 드래곤즈와의 경기에서 오른 무릎 전방십자인대 파열이라는 큰 부상을 겪었다. 물론 그 이후로 다시 경기에 나서 재기에 힘썼지만 부상이 다시 재발하는 불운을 겪었다.


그는 무릎의 수술 자국을 보여줬다. 손으로 만지니 무릎 아래쪽이 움푹 들어갔다. 수술만 여섯 번을 했다는 그는 그곳을 가리키며 '인대가 없다'고 표현했다. 수 없이 재발한 부상의 생채기였던 것이다.


"하루에 운동을 네 번씩 했어요. 매일 야채만 먹으면서 죽어라 재활에 매달렸어요. 저 재활치료사 해도 될 걸요. 그런데 또 아프고 그러니깐 정말 왜 나한테 이런 시련이 오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종교를 가지지 않았지만 만약 신이 있다면 내가 뭘 잘못 했는지 묻고 싶어요."


[#4. 휴식, 혹은 외도] "무릎팍 도사에 나가면 할 말 많을 걸요"


드라마 같은 시즌이 종료된 지금 그는 팀의 마무리 훈련을 끝낸 뒤 병원을 오가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오른쪽 골반 부위가 조금 아프다고 한다. 이에 대해 김호 감독은 '피로가 쌓여서 오는 증세'라며 휴식을 확실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귀곡 산장' 같은 구단숙소에서 '24시간 뉴스 채널'과 '몇몇 드라마'를 보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고 한다. 낙후된 대전의 숙소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것밖에 없을 것이다. 혹은 근처 군부대의 나팔소리와 군가로 하루의 시작과 마무리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무료할 법도 하다. 과거 잘 나가던 시절 그는 연예 프로그램 종종 등장했다. 최근 인터넷에는 그가 출연했던 시트콤, 뮤직 비디오 동영상이 돌아다닌다. 혹시 방송국에서 불러주면 다시 나갈 생각은 있을까?


"일 년 내내 운동하고 나면 지쳐요. 공부하는 사람이 매일 공부만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다른 경험을 해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에요."


이쯤 되면 '고종수 아직도 정신 못 차렸다'는 비판의 소리가 들릴 만하다. '노는 기질'을 버리지 못했느냐며 반성하라는 이야기도 나올 것이다.


"물론 운동에 지장을 주면 안 되죠. 시즌 종료 후 휴식기간 동안에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운동장에서 거친 부분만 보여주다가 새로운 것을 보여주는 것도 일종의 팬 서비스 아닐까요? 팬들이 그런 부분을 알아주면 좋겠어요."


최근 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즈의 타자 양준혁(38)은, MBC 예능 프로그램인 <황금어장>의 '무릎팍 도사'에 출연하기로 했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뭐든지 팬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선수들이 먼저 다가가야 한다. 훈련에 지장을 받지 않는다면 비시즌 때 개그 프로그램에도 출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양준혁의 발언은 고종수의 생각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넌지시 그에게 물었다. 무릎팍 도사에 출연해 '자신의 고민 상담'과 동시에 '대전'과 '축구'를 홍보해 볼 생각은 없느냐고.


"만약 무릎팍 도사에 나간다면 할 말 많을 거예요. 제 인생이 완전 인간극장 따로 없잖아요. 영화로 찍어도 될 걸요."


 
지난 7일 대전에서 만난 고종수 선수.
ⓒ 이성필

 

[#5. 인생의 동반자] "팬들과 통닭에 생맥주 한잔 했으면..."


그는 요즘 부모님의 건강이 걱정이다. 한 분이라도 괜찮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않아 더욱 그렇다.


"수원과의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 때 관중석에서 보셨대요. 몸이 아파서 힘드신데도 오셨더라고요. 이기니깐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제가 재기하고 우리팀(대전)이 6강까지 오르는 모습을 보며 부모님께서 용기를 많이 얻으신 것 같아요."


부모님과 더불어 그에게는 감사하고 함께 가야 할 대상이 있다. 바로 자신을 묵묵히 응원하던 팬들이다. 수원에서 전남으로 다시 대전에 오기까지 이들은 한결같이 그의 부활을 기원했다. 경기장에는 그의 출전 여부와 상관없이 '왼발로 통한다! 고종수' 혹은 '고종수. 그는 프로이기에 아름답다'는 펼침막이 늘 걸려 있었다.


다른 종목보다 팀에 대한 팬들의 충성도가 강한 대한민국 풍토에서 선수가 옮길 때마다 응원하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그의 별명 '앙팡테리블'로 명명된 팬클럽에 대한 고마움은 상당하다.


"김호 감독님은 늘 팬에 대해서 소중히 여겨야 하는 마음을 심어주셨어요. 팬들을 만날 때도 슬리퍼를 신고 나가서는 안 된다는 등 세세하게 지적해주셨죠. 예전에 감독님이 좋아하는 팬들과 관광버스 빌려서 여행도 가고 그러던데 저도 나중에 그렇게 해보고 싶어요."


역시 스승의 영향이 컸다. 최근 그는 팬 페이지에 짧은 글을 남겼다. 시즌 종료하면 '회식'하자고….


"예전에는 휴가 때 만나서 신당동에 떡볶이를 먹으러 가고는 했어요. 그땐 대부분 학생이었는데 이젠 다들 성장했잖아요. 결혼도 하고, 돈도 벌고. 이제는 통닭에 가볍게 맥주 한잔하며 이야기했으면 좋겠어요. 어른이니까요."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대전의 연습 시간과 맞물리게 됐다. 마지막으로 만약이란 가정 하에 국가대표에 부름 받을 몸이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여전히 공격형 미드필더인 그의 감각적인 패스를 그리워하는 팬들이 많기 때문이다.


"국가대표에 큰 미련은 없어요. 이미 월드컵에 한 번 뛰어 봤잖아요. 지금은 그런 생각 할 여유가 없어요. 부르면 가는 거고 아니면 마는 거죠. 그래도 나라에서 부르면 당연히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개인에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시원시원한 대답, 그러면서도 뭔가 생각이 많아진 그의 모습이다. 새로운 전환점에 서 있는 고종수가 어떤 길을 선택해 걸어갈지 궁금해진다.

-- 출처 : 오마이뉴스(www.ohmynews.com) --
블로그 이미지

요다할아범

,
최근 퍼거슨 감독의 맨유 감독 취임 21주년을 맞이해서 맨체스터이브닝뉴스에서
퍼거슨 감독의 역대 영입선수 21명을 순위별로 선정해서 발표했습니다.



21위는 87년부터 98년까지 맨유 선수로 있었던 브라이언 맥클레어가 선정됐습니다.
당시 85만 파운드로 영입했으며, 그후 맨유에 12년 간 있으면서 스트라이커던 혹은
미드필드던, 포지션에 가리지 않고 묵묵히 뛰었으며, 나중에 코치생활도 맨유에서 하면서
팀에 충성해 온 선수라고 추켜세우고 있습니다.




20위는 작년 시즌 후반기에 임대로 영입한 헨릭 라르손을 선정했습니다.
비록 임대로 와서 13경기 밖에 뛰진 않았지만 팀에 끼친 영향을 결코 괴소평가 되어선
안될 선수라고 합니다.
만약 그가 작년시즌 계속 뛰었다면 맨유의 작년시즌의 챔피언스리그에 영향을 끼쳤을
거라고 주장합니다.



19위는 현재 맨유의 중앙수비수인 비디치 선수를 꼽았습니다.
영입 초기에는 불안했지만 나중에 그는 맨유 수비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면서
과거 맨유 주장인 스티브 브루스를 연상케 할만큼 용기와 골본능이 있다고 합니다.




18위는 현재 맨유 수문장인 반데사르 골키퍼를 꼽았습니다.
과거 피터 슈마이겔 이후 그에 가장 필적할만한 선수라고 평가합니다.




17위는 스트라이커인 드와이트 요크가 선정됐습니다.
지금도 맨유 팬들은 그가 얼마나 뛰어난 선수였는지를 모른다고 하면서 맨유가
트레블을 달성할 때에 뛰어난 선수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16위는 현재 수비수인 리오퍼디난드를 선정했습니다.
맨유가 자랑하는 클래스 수비수이이며 맨유 선수로서 시즌 데뷔할 때 리그우승의
수훈갑이었다고 합니다.




15위는 아직도 선수생활을 하는 테디 쉐링엄을 꼽았습니다.
에릭칸토나가 31살의 나이로 은퇴를 선언했을 때, 동갑내기인 쉐링엄이 그의 대타로
맨유에 입단했고, 4년동안 맨유의 트레블 달성을 포함한 리그우승에 기여한
선수로 꼽힌다고 합니다.



14위는 앤디콜 선수를 선정했습니다.
당시 글랜호들 대표팀감독을 포함한 세간에 끊임없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 왔던 선수지만
그는 맨유선수로서 275 경기에 나와서 121골을 넣으면서 5번의 리그우승, 2번의 FA컵
그리고 챔피언스 리그 우승의 공로자라고 합니다.




13위는 맨유 중앙수비수였던 얍스탐 선수를 꼽았습니다.
그의 파워풀한 수비력으로 맨유 트레블 달성의 일등공신으로 꼽았습니다.
만약 맨유가 그를 서둘러 팔지 않고 팀에 잔류했다면 아마도 맨유는 챔피언스리그를
4연패까지도 가능하게 할수 있었다고 평가합니다.



12위는 웨인루니를 곱았습니다.
폴게스코인 이후 활력이 넘치는 재능있는 선수가 없었다가, 웨인루니가 출현하면서
맨유는 그를 잡았고, 맨유 데뷔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여 2700만파운드의
엄청난 몸값을 지닌 가치를 증명한 선수라고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맨유에서 그는 더욱 지대한 공헌을 할 선수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11위는 89년부터 98년까지 맨유에 있었던 수비수인 게리 펠리스트가 선정됐습니다.
89년 당시 230만 파운드로 미들브스로에서 영입했는데 당시는 잉글랜드리그의
역대 최고 이적료라고 합니다.
당시 맨유 데뷔 전에서 실수로 2골을 헌납하면서 최악의 데뷔전을 치루었지만
그후 다시는 그런 실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10위는 현재 맨유 최고의 에이스로 거듭난 크리스티아노 호나우두가 뽑혔습니다.
베컴의 후계자로 영입된 그는 볼튼 데뷔전에서 현란한 기술로 팬들을 매료시켰고
지금은 세계 최고 선수 가운데 하나로 성장했다고 합니다.




9위는 현재 버밍햄의 감독이자 당시 맨유 주장이었던 수비수 스티브 브루스가
선정됐습니다.
당시 수비의 핵심인 테리부처가 떠나면서 그 대안으로 브루스를 영입했고,
그후 퍼거슨 감독은 그가 있을 동안 다시는 테리부처를 그리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8위는 현재 블랙번 감독인 마크 휴즈를 선정했습니다.
원래 그는 퍼거슨 감독이 오기 전에 바르셀로나로 옮겼지만 나중에 퍼거슨 감독은
88년에 그를 다시 데려오는데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팀에 있을 동안 휼륭하면서도 활력이 넘치는 골을 넣었는데, 특히 90년도 FA컵의
결승전에서 크리스탈팰리스를 상대로 2골, 컵위너스컵 때에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스트라이커로서 자기 역할을 다한 선수였다고 합니다.



7위는 작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올레 군나르 솔샤르를 곱았습니다.
경기 도중에 벤치에서 일어나 놀라운 활약으로 골을 넣은 슈퍼서브 이상의 선수였다고
하면서 특히 99-2000시즌에 챔피언스리그의 결승 전에 승리의 최고 주역이라고 합니다.



6위는 작년 시즌 직전에 레알마드리드로 옮긴 반니스텔루이가 선정됐습니다.
치명적인 무릎 부상을 극복하고 맨유에 있으면서 217경기에서 150골을 넣은
골머신이라고 칭찬합니다.
그런 그의 기록은 과거 맨유 전설인 바비찰튼과 데니스로에 비견된다고 평가합니다.




5위는 1990년 부터 2000년까지 맨유에 있었던 데니스 어윈을 선정했습니다.
맨유 역대 최고의 좌측윙백 중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으며 거의 실수가 없는 선수였다고
합니다.
퍼거슨 감독 밑에서 그는 기복이 없이 언제나 똑같은 실력을 발휘했다고 합니다.




4위는 이제 맨유의 살아있는 전설이 된 라이언 긱스가 선정되었습니다.
데이빗베컴, 폴스콜스, 니키버트, 네빌 형제를 포함한 맨유 유스시스템이 길러낸
걸작품이라고 합니다.
맨유 데뷔 이후 15년간 줄곳 좌측에서 끊임없는 최고의 플레이를 선사해 왔으며
앞으로도 바비찰튼이 보유한 759 경기 출전기록를 깰 선수라고 합니다.



3위는 현재 선더랜드 감독인 로이킨이 선정됐습니다.
93년에 브라이언 롭슨의 후계자로 영입했으며 중앙미드필드로서 90년대를 통해
맨유의 심장으로 자리잡으면서 맨유의 영광을 펼치 선수라고 합니다.




2위는 91년부터 99년까지 맨유의 수문장으로 활약한 피터 슈마이겔 골키퍼가
선정됐습니다
맨유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이면서 맨유의 가장 위대한 선수라고 평가합니다.
당시 브론드비에서 55만 파운드에 영입했는데, 퍼거슨 감독은 이런 이적거래를
가리켜서 세기의 바겐세일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퍼거슨 감독이 영입한 역대 최고 선수 1위는 에릭 칸토나가 선정됐습니다.
과연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맨유가 이 위대한 영광이 있었겠느냐고 반문합니다.
86년에 퍼거슨 감독이 팀을 맡으면서 리빌딩의 일환으로 영입한 그는 그후 부터
수많은 맨유의 영광을 이루어 낸 선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활약은 맨유의 골든제네레이션인 긱스,베컴, 스콜스 등에도
영향력을 미쳤고 이제 맨유의 전설이 된 선수라고 합니다.


글쎄요..
아마도 많은 맨유 팬들이 베컴?은 왜 없지라고 할수도 있을 것 같네요.
그리고 맨유 팬들이 평가는 역대 최고의 미드필드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폴잉스도
안 보이네요.
그리고 지금도 뛰는 폴스콜스도 낄수 있을 것 같고, 묵묵히 맨유의 우측 수비를
담당하면서 기복없는 플레이를 펼치는 주장인 게리네빌도 안 보이네요.
아마도 이것은 어디까지나 맨체스터이브닝에서 주관적으로 평가한 기록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참고로 퍼거슨 감독의 최악의 영입도 선정했습니다.
이태리 출신의 골키퍼인 마시모 타이비는 99년 베네치아에서 영입해서 2000년까지
뛰었는데, 아마도 맨유 역사상 가장 최악의 골피커일 거라고 합니다.
그리고 2003-5년까지 맨유에 있었던 젬바젬바 선수는 잠재적으로 로이킨의
후계자라고 평가했지만 결국 실패했다고 합니다.
또한 2003-5년까지 뛰었던 클레베르손도 바르셀로나의 호나딩요 영입에 실패하면서
대신 영입하면서 퍼거슨 감독도 호나딩요에 견줄 선수라고 평가했지만 결국
공통점은 국적이 같다는 사실 하나 뿐이었다고 합니다.
블로그 이미지

요다할아범

,
"걸렸다 생각되면…"으로 시작하는 제약사의 선전 문구가 주효했는지 감기는 초기에 잡아야 한다는 뜬소문이 이제 신념이 되어 있습니다.

내용 자체의 진위를 떠나 의료의 3륜인 제약사·의사·약사에게는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문구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이 말의 진위를 감별할 주체 또한 그들이므로, 그들의 은근한 방조를 틈타서 '초기 감기박멸'에 대한 믿음은 생명력을 이어갑니다.


그간의 연구들을 종합하여 결론부터 말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이며, 객관성을 기하고자 일단 잘 증명된 의과학의 이론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감기의 90~95%는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이며, 현존하는 감기약 중에서 감기 바이러스를 대상으로 한 약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감기를 초기에 잡는다는 말은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이며 우리나라에서만 통용되는 말입니다.


감기를 초기에 잡는다는 말, 전혀 근거 없다

 
70년대 어린이 감기약 광고.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약 광고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같은 감기약 광고. 어린이들은 감기에 잘 걸리기 때문인데, 최근 이론에 따르면 잦은 감기는 어린이들의 성장을 돕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제약사들이 감기를 초기에 없애야 한다면서 사용하는 약물들은 과연 무엇일까요? 잘 아시다시피 감기에 따라오는 증상을 억제하는 약물들입니다. 콧물과 재채기, 기침을 억제하는 약물과 진통소염해열제 등등입니다.


콧물은 을지문덕 장군처럼 수공으로 비강을 통해 호흡기로 접근하는 적(바이러스)들을 흘려보내거나 사멸시키고, 재채기와 기침은 비유하자면 장풍을 이용하여 적들을 밀어내는 일을 합니다.

또한 바이러스는 열에 매우 약하므로 시상하부의 작동으로 발열을 일으켜 적을 약화시킵니다. 그리고 편도 등등의 임파기관들은 제갈공명처럼 적을 국소로 유인하여 섬멸하므로 전장터가 붓고 아프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몸의 지혜(WISDOM OF BODY)가 벌이는 방어전술을 억제하는 이런 약물들을 쓴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대처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몸이 하도 지혜로워서 그러한 방해에도 생명을 지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가 반복되면 몸은 지쳐갑니다. 근래 여러 만성병들이 기승을 부리게 된 근본 이유 중에 하나가 이것입니다. 화학약물사용의 증가추세와 만성난치성 질환의 증가추세는 연관되어 있습니다.
 
모든 약은 정확히 말해 독(毒)입니다. 독이니까 약(藥)이며, 독을 적당히 사용하는 것이 바로 약물입니다.

이것은 의과대학의 약물학 서장에 나와 있는 경구입니다. 풀어서 말하자면 '증상'이라는 것은 우리 몸이 처한 상황에서 생명을 존속하고자 하는 복구와 유지 노력입니다. 이러한 노력을 막기 때문에 독이라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 몸의 기능(=증상)을 독을 통해 조금 억제해 놓으면 증상이 덜 생기므로 일시적으로는 치료제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약물치료를 대증요법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은 증상이 없습니다. 산 사람만이 증상이 있습니다. 그런 증상을 약으로 없애는 것입니다.

오늘 먹는 약 한알, 암으로 가는 한 계단

그러므로 약물학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경우에만 약물을 사용할 것을 신신당부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너무 고열이 나서 경기(驚氣)를 한다든지 고열과 통증으로 잠을 못 자게 되어 그것이 더 해로운 경우에만, 해열진통제를 일시적으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매순간 대사를 조정하고 세포분열 등을 결정하고 지휘하는 몸에 외부의 화학물질(약)이 들어가 하나된 몸의 체계를 방해하므로 약물의 장기 사용은 암 발생을 예고합니다. 암이란 전체(몸)의 결정을 따르지 않는 조직(세포)이며, 바로 인체에 투여된 약물의 행동과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현대 약물을 사용할 때에는 반드시 손익분기를 고려해야 함을 의학 교과서는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

 
"감기 뚝 떨어지게 주사 한방 놔주세요"라는 엄마에게 "이 정도면 됐어"라면서 가글 등의 자연치료법을 적어주는 의사를 보여주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공익광고. 어린이에게 의사가 주는 '약'은 사랑이 담긴 귤이다.
ⓒ 권박효원
 

그러나 임상 현장에서 이렇게 주의깊게 약물을 쓰는 광경은 우리나라에서는 참으로 진귀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1인당 약물소비량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의 3배에 달하는데, 약물 중 우리가 개발한 것은 거의 전무하다고 할 수 있어 경제적으로도 거대한 손해를 감수하고 있습니다(의산복합체).


한 번 투여된 약물은 간에서 대사되고 신장으로 배설되지만, 이 약물이 끼친 영향은 평생을 지속합니다. 마치 자라는 나무에 상처가 생기면 나이테에 영원히 남는 것처럼 유기체에 가해진 모든 것은 기억되며 이것은 자기조직화(seif-organization)와 자기제작(autopoiesis)이라는 원리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생명력이라는 고유한 컵이 각종 해로운 것들로 가득 차서 넘치는 날이 암이 발생한 날이라면, 오늘 투여한 화학약물은 어쨌거나 암으로 넘치는 데 일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주 작다하더라도 암으로 향하는 작은 계단을 오른 것입니다. 하물며 이제 장구한 미래를 살아갈 어린 날에 투여된 약들은 장차 화근의 불씨임이 틀림없습니다.


우리 아기 왜 열나지? 의사보다 엄마가 더 잘 안다


진료실에서 경험해 보면 엄마를 위해 아기들이 고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이가 미열이 나거나 한 두 번 기침하거나 콧물을 흘리면 엄마들은 곧장 병원으로 갑니다. 그러고는 감기초기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안심하고 통과의례인 주사를 맞고 약을 받아 옵니다.


그러나 의사로서 솔직히 고백하면, 그것이 감기 초기인지, 큰 병의 시작인지는 의사나 엄마나 모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기에 어떤 검사를 해도 감기를 확진할 수 없으며 바이러스나 세균의 배양 검사는 수일이 걸려야 결과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초기 감기라는 것은 짐작이며 그럴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지, 무슨 근거로 한 진단은 아닙니다. 오히려 함께하며 매일 관찰하는 엄마가 더 정확합니다.


한 마디로 의사는 부족시대의 제사장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의사만큼은 초기감기를 구별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며, 제사장에 대한 신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므로 엄마의 안심을 위해 아가의 엉덩이는 주사바늘의 수난을 감수해야 하고 아가의 간과 신장은 해독이라는 수고를 더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감기 바이러스를 상대하느라 힘든데 말입니다.


 
어린이들은 아픈 만큼 성장합니다. 스스로 감기를 이길 수 있게 길러주세요(이 사진은 기사 내용과 특정 관련이 없습니다).
ⓒ 남소연
 

한편 아가나 어린이들은 어른들에 비해 생명력이 막강한데도 왜 감기에 자주 걸릴까요? 이문제는 의학계의 오랜 화두입니다. 생각이 먼저 있고 그것을 따라 대뇌의 뉴런이 작용하는지, 대뇌의 뉴런의 작용이 먼저여서 생각이 발생하는지처럼 오랜 숙제였습니다.


근자의 유기시스템이론은 어린이의 잦은 감기가 어린이의 빠른 성장에 매우 필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육체적인 성장이 매우 빨라서 몸 시스템(body system)의 구조조정이 자주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회사가 발전하면 그저 인원을 늘리고 부서를 계속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체계로 전환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과 유사합니다.


그렇다고 아픈 아이를 내버려둬? 부드럽게 주물러 주세요


그러므로 감기에 걸렸을 때는 반드시 휴식과 안정이 필요하며 감기를 빨리 치르도록 돕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래서인지 감기를 앓고 나면 어린이가 심리적으로도 좀더 성숙했음을 우리는 자주 경험합니다. 감기가 만병의 근원이었던 이유는 초기에 잡으려는 어리석음이 저지른 생명력에 대한 방해였음은 이제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감기 증세로 아픈 어린이를 보고만 있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열이 나면 전신을 만져 보십시오. 어딘가에 열이 몰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드럽게 주물러 주시면 몰린 고열이 퍼지면서 몸이 편해집니다.

사실은 이러한 물리적 효과보다는 엄마(아빠)와의 접촉을 통한 안도감이 더욱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때 잊지말고 어린이에게 "엄마가 대신 아팠으면 좋겠다"고 말하십시오. 이 말은 아픈 어린이들에게 가장 강력한 치료제입니다.


그리고 생강차를 마시거나 꽃에센스를 쓰고 감기 혈 자리에 양초 뜸을 시행하면 좋을 것입니다. 아픈 만큼 성장합니다. 그렇다고 아픔을 아무렇게나 다루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입니다. 특히 어린이들을 위해서는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 출처 : 오마이뉴스(www.ohmynes.com) --
블로그 이미지

요다할아범

,
 
▲ <이산> <이산>의 월페이퍼
ⓒ iMBC
 

조선왕조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을 고르라면 역시 '사도세자 폐사 사건'입니다. 일국의 세자가, 그것도 아버지에 의해 쌀궤짝에 갇혀 죽은 것입니다. 세자의 품위에 걸맞지 않은 아주 비참한 죽음이죠.


이 사건을 후세에 가장 명확히 전해주는 사료는 역시 <한중록>입니다.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가 한글로 저술한 책입니다. 가장 가까이서 사건을 지켜본 사람의 기록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널리 전해진 사료입니다.


하지만 이 <한중록>은 자세히 뜯어보면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조선의 역사에 걸쳐 가장 영특한 임금 중 1명으로 평가받는 영조, 그리고 어릴 때부터 신동의 자질을 발휘했다는 사도세자. 이 부자가, 사도세자가 점점 머리가 커짐에 따라 일종의 '정신병 촌극'을 벌였다는 것입니다.


<한중록>을 잘 보면 영조는 '치매노인' 쯤으로 그려지며, 사도세자는 조울증과 편집증 등 다양한 정신병 질환에 시달리는, 말 그대로 '정신질환자'입니다.


혜경궁 홍씨에 따르면, 조선 후기 르네상스의 기초를 닦은 임금 영조가 시종일관 콤플렉스가 범벅이 된 성격이상자였으며 치매노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정신병에 시달리는 부자에 의해 조선 후기 르네상스의 기초가 시작됐다는 것입니다. 너무 극단적입니다.


사학자 이덕일은, 혜경궁 홍씨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사도세자의 비극'에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정치논리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저 유명한 '예송논쟁'과 '장희빈'을 기억하면 이 주장이 일리있다는 판단도 들 것입니다. 앞서 벌어졌던 '예송논쟁'과 '장희빈' 모두 당파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엇갈린 정치적 사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도세자 '왜' 죽었을까


영조의 배다른 형 경종은, 과거에 자신의 어머니 '장희빈'을 죽이는 데 앞장선 집권당 노론을 일시에 몰아낼 기회를 노리던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합니다.


곧바로 '독살설'이 제기됐고, 주범으로는 노론과 노론이 임금으로 밀던 '연잉군(영조)'이 지목됩니다. 연잉군은 배다른 동생으로, 자식이 없던 경종이 사망할 경우에는 왕위계승 1순위였던 왕세제였던 것입니다.


'경종독살설'은 당시에 전방위적으로 펼쳐진 의혹이라고 합니다. 성벽과 마을에는 온갖 '괘서'가 붙여졌었고, 소론 계열의 이인좌는 경종의 위패를 들고 반란까지 일으킵니다.


총체적인 위기였죠. 역사적으로, 영조는 이때부터 '탕평책'을 주장합니다. 자신의 원수나 다름없던 소론도 조정에 기용하면서 노론과 소론의 조화를 추진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왕이든 뭐든 자신을 충실히 지지할 수 있는 집단을 편애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조는 왕이지만 그 역시 사람입니다. 게다가 배다른 형을 독살했다는 소문에 노론이같이 연루됐기 때문에 심리적인 공감대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세자는 바로 아버지가 연루된 '큰아버지의 독살설'을 거론하며 대들었다가 비참하게 죽었다는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사도세자는 소론 계열 선비들에게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노론이나 영조로서는 그를 좌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결국, 자신의 아버지에 의해, 노론의 중진이었던 자신의 처가가 앞장서면서, 그리고 자신보다 친정을 더 따르던 아내 혜경궁 홍씨의 방관 아래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의 한을 기억하는 이는 단 한 명, 바로 11살의 나이로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세손 '산(?)'이었습니다.


비극적인 어린 시절, 위태로웠던 즉위 과정


노론으로서는 당연히, 세손의 즉위를 막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옵니다. 왕위에 즉위해서 아버지의 복수를 하겠다고 벼르면 꼼짝없이 죽어야 할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손은 심지어 궁궐을 넘어들어오는 자객까지 맞이하는 등 극단적인 처지에 빠집니다.


주변에는 누구도 도울 사람이 없었습니다. 외할아버지의 동생 홍인한마저도 폐세손을 주장했고, 고모 화완옹주는 양자 정후겸의 왕위 즉위를 추진하면서 역성혁명까지 꿈꿉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혜경궁 홍씨가 '모정(母情)'은 잊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아들만큼은 철저히 보호했으며, 기어이 왕위에 오릅니다. 하지만 영조가 일찍이 잃은 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됨으로써 즉위한 정조는, 10여년을 참았던 한 마디를 내뱉는다고 하죠. 아주 비장합니다.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로다."


결국 선전포고였습니다. 정조와의 개인적인 원한을 차치하더라도, 영조의 편애 아래 수십년을 독주했던 노론은 정치적으로도 경장(개혁)의 대상이었으며, 조선 팔도에 걸쳐 어디에든 그들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전방위적으로 힘을 과시하는 구체제는 제 아무리 왕이라 할지라도 쉽게 타파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가장 결정적으로 자신을 방해할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 역시 노론 중신 가문의 딸이었기 때문에 사이가 좋을 리는 결코 없었던 것입니다.


드라마 <이산>이 다룰 이야기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누구보다 비극적인 성장기를 보냈고, 어렵게 왕위에 즉위해서도 평생을 구체제와의 갈등으로 소모한 '정조'의 이야기죠.


<이산>, <한중록>과 <사도세자의 고백>의 타협


"사도세자는 당쟁의 희생양"이었다는 주장은, 이덕일의 <사도세자의 고백>을 통해 구체적으로 거론됩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덕일은 <한중록>에 대한 전면 비판으로 색다른 시각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다룹니다.


<이산>은 1, 2회에 걸쳐 사도세자의 죽음을 다뤘습니다. 정조를 이야기하자면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이죠. 하지만 <이산>은 '타협'을 추구합니다. <이산>에서는 사도세자가 왜 쌀궤짝에 갖혔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산>의 홈페이지에 공개된 '등장인물의 관계' 등에 대한 설명에서, <이산>이 어떻게 '타협'했는지는 잘 드러납니다.


먼저, 앞장서서 '폐세손'을 주장했던 홍인한이나 화완옹주, 그리고 정후겸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대결구도'를 굳혀놨습니다. 하지만 가장 예민한 '혜경궁 홍씨'나 '홍봉한'에 대해서는 역시나 <한중록>을 따른 것 같았습니다.


그들의 역할이 구체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누구보다 중요할 이 캐릭터들은 존재감도 희미하며, 어딘가 어색합니다.


물론 그네들에게도 "세손이라도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홍인한의 적극적인 움직임을 사실상 방치했던 점으로 봐서는 그네들 역시 최소한 사도세자의 죽음에 있어서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손댄 일이 자신의 외할아버지와 작은 외할아버지를 각각 귀양보내거나 사약을 먹인 일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홍봉한 역시 뭔가 모종의 역할을 했던 것을 유추할 수도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친정을 지키려는 혜경궁 홍씨와의 정조의 갈등 역시 만만치 않았다고 하는데, 이쯤 되면 우리는 역시 그동안 계유정난이나 중종반정을 다룬 사극에서 느낀 역사의 교훈을 한번 더 느끼게 됩니다.


"권력은 피도 눈물도 없습니다"


<이산>도 팩션 사극


<이산>도 팩션 사극을 표방합니다. 정조의 그림자처럼 그려질 '박대수'나 성장과정이 기록되지 않은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 등이 정조가 세손이었을 당시에 인연이 이어져 삼각관계를 이룬다는 식의 이야기가 추가된 것입니다.


물론, <이산>의 팩션은 실록에 기록된 인물의 탄생시기까지 조절한 <왕과 나>와는 달리, '고증'을 중시하는 일부 시청자들의 반발을 살 우려는 적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정사에 기록된 틀 자체가 바뀔 정도의 '팩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팩션'보다 중요하게 여겨야 할 점이 있다면 이순재의 '영조' 연기일 것입니다. 사도세자 폐사 당시 그는 이미 일흔에 가까워졌고, 40년 가까이 왕위를 지킨 대정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산>에서 신하들이 감히 대꾸조차 못할 정도로 엄격한 임금으로 그려지는 모습이 일리가 있는 것입니다. 정치밥 40년이라. 게다가 자신을 둘러싼 "배다른 형을 죽였다"는 소문과 그로부터 촉발된 역모까지 제압한 입지전적인 임금입니다.


<이산>에서 그가 왜 사도세자를 죽였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의 묘사가 궁금해지는 일면도 있습니다. <한중록>에서는 사도세자 폐사 이후의 영조를 철저하게 치매노인으로 묘사합니다.


하지만 민감한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기 때문에 <이산>으로서는 묘사의 폭을 넓힐 수 있다는 효과를 얻었습니다. <거침없이 하이킥>으로 더 확실한 탄력을 얻은 이순재의 노장 연기를 기대해볼 수 있는 여지도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재미있는 것은, 실제로 정조의 최대 적수였던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가 사라지고, 최석주라는 가공인물이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영화 <영원한 제국>을 보신 분이라면, 최종원이 기가 막힐 정도로 연기한 심환지의 이미지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싹 마른 노인 이미지의 '심환지'가 풍체 넉넉한 중견연기자 조경환을 만나 전혀 상반된 캐릭터 '최석주'로 변신한 것, 어떤 의도일지는 모르겠습니다. 꽤 궁금해집니다.


비극의 임금, 왜 호기심이 느껴질까


<왕과 나>에서는 '예종독살설'을 묘사하면서, 그리고 선대의 공신들에 둘러싸인 성종을 그리면서 구체제와 싸우려다 실패하거나 좌절하는 임금의 초상을 그려나갑니다.


이런 식의 이야기는, <용의 눈물>이나 <장희빈>과 같이 임금의 절대적인 힘을 이야기하던 지난 10년간의 사극 패턴과는 또다른 이야기 구도입니다.


'왕'이라는 인물의 오래된 인식에서 벗어나 보다 섬세하면서도 고뇌에 휩싸이는 '인간'을 더 주목하는 경향이 통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죠. 이미 종영된 <한성별곡-정>도 '경장'을 주도하면서 사실상 좌절하는 정조의 내면을 잘 드러냈던 적이 있습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연개소문>과 같이 절대권력자를 묘사한 사극이 유행했고, <주몽>이나 <대조영> 같은 창업군주를 다룬 사극이 유행했다는 것을 기억해본다면 이건 또다른 변화라는거죠. 사극, 이렇게 점점 섬세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 출처 : 오마이뉴스(www.ohmynews.com) --
블로그 이미지

요다할아범

,
 
<무한도전>의 성공법칙 첫 번째는 끊임없는 도전과 변화이다.
ⓒ IMBC
 

드라마에도 시기마다 시청자들이 선호하는 바가 있고, 그것에 따라 조금씩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변화한다. 그러한 면에서 볼 때 예능프로그램의 변화는 드라마 쪽보다 속도가 빠르고, 쉽게 변화해야 오래도록 인기프로그램으로 장수할 수 있다.


그래서 장수하는 프로그램은 한 포맷으로 몇 십년 유지한 것이 아니라 시기마다 적절한 변화를 꾀하며 포맷에 변화를 주어 살아남았다. 가령 <일요일 일요일 밤에>는 몰래카메라로 인기를 얻은 뒤, 양심냉장고, 인간극장 등의 포맷으로 꾸준한 변화를 시도했고, 그것이 시청자들에게 눈길을 끌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실 예능프로그램은 드라마보다 더 치열한 전쟁터인지도 모르겠다. 그중에서 시청자들의 변화의 흐름에 부흥하는 프로그램이 바로 <무한도전>이다. 어쩌면 그러한 흐름의 변화를 보여주는 유일한 프로그램일지도 모른다. 특히 그러한 변화를 몸소 선도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무한도전>의 인기는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가령 <상상플러스>를 보자.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프로그램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래서 예능프로그램도 KBS가 장악하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노현정 아나운서를 앞세운 <상상플러스>는 '세대공감 올드 앤 뉴'는 전성기를 구가했다.


사실 <상상플러스>는 스타를 초대해 네티즌들의 댓글을 읽어주는 형식으로 처음 안방극장을 찾았고, 두 번째 변화를 꾀한 것이 바로 '세대공감 올드 앤 뉴'였고, 그것이 안방극장에 거센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지금은 그 프로그램의 포맷에 변화를 주는데 실패해 인기가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매주 <무한도전>은 우리에게 어떠한 내용을 가지고 안방극장을 찾을지 기대감을 부풀어 오르게 하며, 시청률이 간혹 20%를 넘는 수준이지만 체감 시청률은 최고라고 할 수 있다. 케이블 TV에서 어느 채널에서 무한재방송을 하는 걸 보면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그리고 매주 새로운 포맷으로 우리의 기대에 부흥하고 있는 <무한도전>의 생존 필사기는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끊임없는 도전이 만든 변화의 웃음!


<무한도전>은 사실 '세대공감 올드 앤 뉴'의 형식을 따라하고 싶은 마음에 '마봉춘'을 등장시켜 비슷한 포맷을 유지하되, 그 퀴즈의 수준은 상당히 유치할 정도의 것들로 구성했다. 그래서 장시간 그러한 포맷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무한도전>은 매주 조금씩 다른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무한도전>은 생존하고자 매주 네티즌들의 반응을 살피며 비난에 가까운 힐난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조금씩 수정․보완해 나갔다. 그것이 <무한도전>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방법이지만 지금의 성공요인으로 작용한다.


즉 그러한 프로그램의 포맷을 보완하면서 매주 다른 포맷으로 변화를 주게 되었고, 결국 <무한도전>은 어떠한 기본적인 포맷이 없는 예능프로그램으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때문에 어떠한 포맷을 끌어와도 모든 걸 소화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성장했다. 아마도 <무한도전>이 사랑받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포맷 자체가 열려있다는 점일 것이다. 


물론 정해진 것이 없다 보니 사실상 매주 네티즌들의 호응을 얻는 것은 아니다. 때론 비난의 목소리도 듣기도 하고, 때론 호평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 사실상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제작진은 물론이고, 출연진들도 힘이 들 수밖에 없다. 늘 위기를 맞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무한도전>은 그 위기를 기회로 만들고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을 얻었다. 그것은 끊임없이 도전하는 그들의 실험정신 덕분이다. 사실 예능프로그램에서 주로 꽁트, 퀴즈 등의 형식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해 출연해도 정식 패션쇼에 모델로 도전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6명의 멤버 모두 '웃겨야 산다'를 좌우명으로 가진 듯 웃기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는다.
ⓒ IMBC

그런데 <무한도전>의 멤버들이 이상봉 디자이너 쇼 무대에 출연해 모델로 나가 당당한 워킹을 선보였다. 그리고 모델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신선한 반응을 이끌어 냈고, 시청자들은 그들의 도전에 박수를 보냈다. 이처럼 아무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무한도전>은 무모할 만큼 도전정신이 투철하다.


물론 그래서 때로는 오히려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대부분 그들의 도전은 칭찬을 받는다. 적어도 그 도전하는 정신만큼은 프로그램의 재미와는 별개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도전은 참 많다. 방송국 앞에서 잠을 잔다든지, 드라마 형식으로 꾸민다든지, 버스로 서울구경을 하러 간다든지 하는 등의 도전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웃음 경쟁, 빛을 발하다!


그러한 도전 정신을 바탕으로 사실상 6명의 멤버들이 각자 하나의 캐릭터로 설정해 보여주는 개그는 이제 친숙할 대로 친숙하다. 그래서 그들이 무얼해도 시청자들은 웃는다. 정형돈이 어설픈 개그를 해도 웃고, 박명수가 여전히 자신을 거성으로 지칭하며 호통개그를 해도 웃는다. 그만큼 <무한도전>의 변화는 시청자들에게 이젠 익숙한 패턴으로 다음 주에는 무엇을 할까, 하는 기대를 자연스럽게 품게 만드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에 6명의 멤버들은 사실 고통스럽겠지만 '웃겨야 산다'를 좌우명처럼 여기는 듯한 인상이 풍길 정도로 모두들 몸을 사리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은 모두가 서로서로 친하지만 끊임없이 웃음을 경쟁하고 날이 갈수록 재미를 더한다.


 
<무한도전>의 변화는 오히려 예능프로그램의 변화를 선도하고 있다.
ⓒ IMBC
 

사실상 6명의 멤버들은 고정적인 캐릭터를 구축해 그 안에서 웃음을 완급 조절해 나갔다. 가령 박명수는 거성으로, 정형돈은 어설픈, 노홍철은 돌아이로. 그래서 그 안에 고정적인 캐릭터를 완벽하게 구축해 놓고 일정하게 간극을 유지하면서 서로 힐난하거나 배신을 일삼으면서 웃음을 유발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무한도전>의 캐릭터를 다른 방송에서도 유지하면서 영역을 확대해 나갔고, 박명수는 유재석의 인기에 버금가는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들 표현대로 드디어 2인자가 된 것이다. 그런데 <무한도전>은 포맷 자체가 늘 변화하듯, 변화를 6명의 멤버들에게도 고스란히 적용했다.


그것은 바로 웃음경쟁이다. 힐난과 배신 등으로 웃음을 유발하더니 이젠 개개인이 서로를 경쟁상대로 여기고 서로 웃기려고 무진장 애를 쓰기 시작했다. 그 사이 몸개그가 다시 부활해 실미도편에서 자학적인 몸 개그를 보여주기도 했다.


'미스코리아', '워터보이즈'에서  몸 개그 경쟁을 펼쳤고, '강변북로 가요제', '서울구경'도 마찬가지다. 끊임 없이 웃음 경쟁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표면화한 것이 바로 '네 멋대로 해라'이다. 6명이 각자 6개의 코너를 연출하는 형식으로 정형돈이 연출한 '체인지'는 서로의 캐릭터를 바꾸어 얼마나 웃기는지 진짜 개그실력을 겨루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래서 정형돈이 연출한 '체인지'는 웃음경쟁을 하고 있음을 시인함과 동시에 그들이 시청자들을 웃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는지 간접적으로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이 빛을 발하며 6명 멤버가 보여주는 개그에 우리는 웃는다. 그리고 다음 주를 기대한다.


이 정도면 <무한도전>이 제목 그래도 끊임없이 도전을 펼치면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정당한 권리를 부여받았다고 해도 과장은 아니지 않을까. 다음 주에 펼쳐진 쇼는 무엇인지 그야말로 기대되는 순간이다.

-- 출처 : 오마이뉴스(www.ohmynews.com) --
블로그 이미지

요다할아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