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예 나홍진 감독의 장편 데뷔작 <추격자>는 시사회를 거치며 평론가와 영화 담당기자들에게 호평을 받은 데다 개봉 첫 주 관객 반응 역시 매우 호의적입니다.
<디워> 이후 관객몰이에 실패하며 침체에 빠졌던 한국영화계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기점으로 소폭이나마 회복의 기미를 보이고 있어 <추격자>에 거는 기대가 남다른 게 사실입니다.
<추격자>는 지나치게 여성을 비하하는 대사나 잔혹한 살인장면이 많고 18세 이상 관람가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평단과 관객의 고른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2008 한국영화의 첫발견'이란 제하의 기획물을 실은 <씨네21>을 비롯한 관련 잡지, 신문의 큼지막한 기사들이 나온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듯합니다.
<추격자>가 한국적 스릴러로 주목받아야 할 첫 번째 이유는 역시 두 주연배우의 강렬한 내면연기에 있습니다. <타짜>(2006)의 아귀역으로 등장해 강한 개성을 보여줬던 김윤석은 영화 속에서 전직 형사이자 출장안마소 포주인 중호역을 맡았습니다.
그가 데리고 있던 여자들이 연쇄적으로 사라지면서 망원동 일대를 헤매던 그는 연쇄살인마 영민(하정우)과 운명적으로 조우하게 됩니다. 중호와 영민의 대결에 대해 “동네에서 가장 야비한 개가 잔인한 들개와 싸우는 영화”란 김윤석의 <씨네21>과의 인터뷰처럼, 중호는 영민을 동물적으로 추적하고 분노하며 싸웁니다.
전직 형사이자 포주라는 직업 설정에서 드러나듯 잔인함과 집요함으로 무장한 중호에게 영민은 사회악이 아니라 자신의 사업을 방해하는 매우 귀찮은 존재일 뿐입니다. 연쇄살인범을 쫒는 전직 형사란 구도만을 두고 보면 중호는 언뜻 선과 악의 2분법적 구분에서 선(善)의 편에 서 있는 듯하지만, 그 역시 포주로서 여성들을 착취하는 또다른 사회악에 불과합니다.
진리와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위험한 싸움에 달려든 중호역의 김윤석은 연기에 대한 동물적 본능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철저하고 진지하게 영화에 몰입해 있습니다.
직업여성들을 살해하는 연쇄살인마 영민을 연기한 하정우 역시 기존 스릴러에서 익히 봐온 살인자와 매우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영화 속에서 까무잡잡한 얼굴에 어리숙한 표정이 대부분인 하정우는 관객의 머릿속에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악인의 모습을 찾을 수 없어 더욱 더 섬뜩하고 무섭습니다. 영민은 영화 속에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살인마, 이른바 사이코패스입니다.
어리숙함과 잔인함을 함께 표현해야 하는 살인마 역에 하정우는 맞춤양복을 입은 듯 딱 들어맞는 연기를 보여줍니다. <용서받지 못한자>(2005), <시간>(2006) 등 몇 편의 영화밖에 출연하지 않은 하정우가 다중적인 살인마 캐릭터를 소화했다는 점은 배우로서 그가 가진 천부적인 영리함과 노력의 결과로 보여집니다.
두 번째 이유는 기존 스릴러 영화의 전형성을 탈피한 영화의 구성에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추격자>에는 선과 악의 구분이 매우 어렵습니다. 전직 형사에 포주인 중호든 살인마 영민이든 결국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직, 간접적인 가해자입니다.
나홍진 감독은 인터뷰에서 중호와 영민은 결국 똑같은 인간들이라고 말합니다. 어느 누구도 선한 편에 두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감독은 두 사람 모두를 사회적인 부조리 현상에 대한 가해자로 설정해 영화를 전개하고 남겨진 평가는 담담하게 관객 개개인에게 맡긴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파격적인 구성은 중호와 영민의 현재 상황을 과거사에 의존해 풀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나타납니다. 통상 스릴러는 살인마의 현재 살인 행위의 원인을 과거 가족사나 과거의 행적에서 찾으려 하지만 <추격자>는 두 사람의 과거에 대한 정보를 거의 주지 않습니다.
스릴러 영화에서 범행을 이해시키기 위해 관습적으로 사용돼온 과거사를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영화는 클라이맥스로 치달으면서 극의 긴장감과 관객의 몰입을 가져오는 효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추격자>가 스릴러로서 재미와 공포를 유지하면서 한국사회의 문제점에 대해 때론 코믹하게 때론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중호가 처음 조우한 영민을 격투 끝에 붙잡아 경찰에 넘겨도, 수사는 지지부진하고 경찰 내부에는 실적 다툼만 일삼다 영민을 풀어줍니다. 그들에게 진정 두려운 건 연쇄 살인마에 의한 시민의 피해가 아니라 오물에 피습 당한 시장으로 인해 언제 내려올지 모르는 상부의 문책입니다.
경찰들의 내부 뇌물 고리와 업체 갈취, 전직 형사의 불법영업이 버젓이 자행되고 있고 피해여성의 안타까운 구조 요청은 무관심 속에 방치되기 일쑤입니다. 나홍진 감독은 영화 속에서 사회적인 부조리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지적하고 있지만, 애써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는 관객들 스스로가 부조리에 대한 냉정한 시선을 갖게끔 유도하고 있습니다.
나홍진 감독은 <추격자>를 만들기 전, 미국의 TV시리즈 <24시>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하고 간접적인 영향이 있었음을 밝힌 바 있습니다. <추격자>는 <24시> 외에도 스릴러로서 사회 문제에 대한 비판까지 아울렀던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2003)의 코믹함과 리얼리즘에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2005) 류의 날카롭고 잔혹한 스타일 묘사에 영향을 받은 듯 보입니다.
기존의 스릴러를 아우르면서도 독창적인 색깔로 한국적 스릴러 <추격자>를 만들어낸 신예 나홍진 감독에게 침체된 한국영화계가 거는 기대는 당분간 지속될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