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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이산>에서는 홍국영과 이산의 만남이 홍국영의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묘사되었다. 정후겸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홍국영이 여러 날 동안의 저울질 끝에 결국 '잘 나가는' 정후겸 대신 '인기 없는' 이산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후 홍국영은 기민한 판단과 대담한 행동으로 세손의 기반을 굳히며 반대파들의 입지를 축소시켜 나간다. 정후겸은 "저 자를 내 편으로 만들든가 죽이든가 했어야 한다"며 이따금씩 아쉬워한다.
드라마 <이산>에 나오는 홍국영의 이미지는 역사 속의 홍국영과 상당 부분 일치하는 것 같다. 외모도 그렇고 지능도 그렇고 언변도 그러하다. 외모 하나만 예로 들어보기로 한다. 영조 48년(1772) 9월 21일자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과거 합격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시력이 나쁜 영조가 "(홍국영의) 용모는 어떠하냐?"고 묻자 승지는 "매우 준수합니다"(甚精矣)라고 대답했다.
머리 좋고 책은 적당히 읽고 입은 좀 투박하고, 약간은 경망스러우면서도 외모만큼은 말끔한 홍국영의 이미지가 드라마에서도 비교적 잘 표현되고 있는 듯하다. 그에 비해 현재까지의 드라마 방영분을 보아서는, 그의 든든한 집안 배경이나 끝없는 욕심 등은 자연스레 표현되고 있지 않는 듯하다.
무엇보다도 아쉬운 것은, 이 드라마에서 극적 효과에만 치중한 나머지 홍국영과 이산의 처음 만남을 제대로 소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홍국영이 어떻게 세손 이산을 보좌하게 되었는지, 세손 이산은 어떻게 그런 '재주꾼'을 측근에 두게 되었는지가 충분히 소개되지 않았다.
정조와 홍국영의 만남은 운명적이었다?
몇 년 안 가서 파탄 나는 두 사람의 관계는 어쩌면 처음 만남에서부터 예고된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만큼은 극적 효과에 치중하기보다는 사실관계에 비중을 두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만약 홍국영과 정조의 만남을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으면, 드라마 <이산>에서 세손을 열렬히 사랑하는 홍국영의 이미지를 본 시청자들은 정조가 즉위 이후 얼마 안 가서 홍국영을 내친 이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을 실컷 이용하다가 '단물'만 빼먹고 팽(烹)하는 권력가라고 정조 이산을 오해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둘의 만남에 대해서만큼은 역사적 사실에 충실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홍국영과 이산이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가에 대한 대답은 비교적 수월하게 도출될 수 있다. 왜냐하면, 과거에 합격하자마자 예문관 사관(史官)에 임명된 홍국영이 세손을 보좌하는 세자시강원 설서까지 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서처럼 홍국영이 정후겸의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고 이산을 선택하는 대단한 결단을 내린 것은 아니다. 과거에 합격한 지 얼마 안 되는 홍국영에게 세자시강원 설서도 겸하라는 임명장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 둘이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영조실록>을 보면, 국왕 영조가 사관 홍국영을 측근에 두고서 가깝게 대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이처럼 홍국영은 관계에 진출하자마자 국왕과 세손을 함께 보좌하는 행운을 얻었다. <이산>에서는 영조가 세손의 추천을 받아 홍국영을 은밀히 만나게 되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영조와 홍국영이 먼저 만나고 그 다음에 세손과 홍국영이 만난 것이다. 이 시점은 이산이 등극하기 4년 전이었다.
과거에 장원 급제한 것도 아니고 11등으로 합격한 홍국영이 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행운을 얻게 되었을까? 단순히 말을 잘해서일까? 그저 머리가 좋아서일까? 홍국영의 집안 배경을 살펴보면, 그 답을 알 수 있다.
<이산>에 자주 등장하는 혜경궁 홍씨, 홍봉한, 홍인한의 성씨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바와 같이, 홍국영은 풍산 홍씨라는 유력한 문벌 가문의 일원이었다. 그리고 경주 김씨인 어머니 쪽도 정순왕후와 이렇게 저렇게 연결된 문벌 가문이었다. 또 홍국영은 영·정조와도 인척관계였다. 특히 정조와는 12촌 인척관계였다.
홍국영, 집안 배경이 든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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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국영이 집권 외척 세력은 물론 국왕 및 세손과도 인척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그렇게 빨리 국왕·세손의 측근이 된 이유를 설명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의 든든한 집안 배경이 그의 출세에 가장 결정적 기여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산의 등극 4년 전에 과거에 합격하고 또 세자시강원에 배치된 것은 홍국영으로서는 그 시점으로 보아도 대단한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위와 같은 역사적 사실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홍국영이 이산을 선택한 것도 아니고 또 두 사람이 의기투합해서 만난 것도 아니다. 왕실과 이러저러하게 얽힌 홍국영의 든든한 배경이 두 사람의 만남을 가능케 한 가장 결정적 요인이었던 것이다.
드라마에서와는 달리 두 사람의 만남은 이렇게 상당히 싱거운 편이었다. 홍국영이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고서 빈약한 세손을 선택했다거나 혹은 세손을 보좌하다가 한때는 똥지게까지 지게 되었다는 것은 드라마의 재미를 돋우기 위한 극적 장치에 불과할 뿐이다. 아무튼 두 사람의 처음 만남은 드라마와는 달리 그렇게 싱거웠다.
이걸로 끝인가? 두 사람의 만남이 의외로 싱거웠다는 것으로 이 글은 끝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두 사람의 만남이 싱거웠다는 사실로부터 중요한 단서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 이 글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두 사람의 만남은 두 사람의 이별을 이해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
둘의 만남이 홍국영의 적극적인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은, 홍국영이 처음부터 어떤 원대한 정치적 이상을 품고 세손에게 접근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집안 배경이 좋은 홍국영은 세손을 보좌하라는 임명장을 받았고, 좋은 머리를 바탕으로 이산의 등극을 도왔지만 결국에는 자기 세력의 확대만을 추구하다가 얼마 안 가서 정조의 버림을 받고 말았다.
드라마에서처럼 홍국영이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 이산에게 접근한 것이라면, 정조 등극 3년만인 1779년에 허망하게 주군의 버림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좋은 배경에 힘입어 권력에 접근한 홍국영은 자신을 키워준 그 배경을 위해서만 열심히 일하다가 정조의 버림을 받고 만 것이다. 이는 그에게 별다른 정치적 이상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홍국영이 정조의 버림을 받은 이유
정조가 즉위한 지 얼마 안 가서 홍국영이 정조의 국정운영(특히 탕평책)에 걸림돌이 되었다는 것은, 홍국영이 애초부터 정조의 국정 비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홍국영이 단순한 권력욕을 떠나서 보다 더 원대한 포부를 품었다면, 그 좋은 머리로 정조의 정치적 포부를 얼마든지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홍국영은 정조의 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는 정조도 자기처럼 권력에만 연연하는 사람인 줄로 착각했는지 모른다. '책을 대충대충 읽는다' 혹은 '경망스러웠다'는 평가처럼, 그는 사물의 본질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이해해버리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런 식으로 정조를 대충 이해해버렸는지도 모른다.
정조와의 만남이 '준비된 만남'이 아니라 그저 '우연적인 만남'이었기에, 홍국영에게는 정조의 꿈과 고뇌를 이해할 만한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홍국영과 이산의 만남이 그처럼 싱거운 만남이었기에, 그들의 만남은 얼마 안 가서 그렇게 쉽게 파탄에 이르고 말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