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에서 시니컬한 홍국영으로 분한 한상진.
ⓒ MBC

"자네 같은 사람이 겨우 그만한 노력으로 무과에 입격할 수 있는 줄 아는가? 무과에 입격하려면 뼈를 깎는 노력을 다해 (중략) 피나는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


대수(이종수) 고개가 떨어지려는데, 단기속성 과외방

선생 나으리가 말했다.


"그건 다……. 개소리네."


깜짝 놀라 쳐다보는 대수에게 선생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을 보탰다.


"병법이란 어차피 상대를 속이는 거라고 손자도 하지 않았나? 어디 적당히 속이고 눙쳐서 입격할 방도를 찾게."


대수는 황당했다. 양반이 어찌 그리 말하냐 따지자 그 양반이 또 말했다.


"양반이니 그렇지. 나라에서 제일 속임수에 능한 게 누군가? 바로 나 같은 도포짜리들이네."


홍국영은 그렇게 등장했다. MBC 드라마 <이산>에서 뭇사람들을 속이고 눙쳐서, 위태한 세손 저하(이서진) 임금 만들기에 맹활약중인 홍국영 아니 한상진을 지난 10일 경기도 용인 근처에서 만났다. 갓 벗고 수염 떼고 도포자락 벗은 그는 딴 사람 같았다. 책사 홍국영보다 신수 훤한 펀드매니저로 보였다. <하얀 거탑>에서 장준혁을 보필하던 ‘깍두기’ 머리 의국장도 아니었다.


홍국영, 다른 사극과 다르게 다르게


"홍국영이란 역할이야. 노력을 많이 해야 해. 부족하니까 열심히 해야 하고."


이병훈 감독이 말했다. 지난 6월이었다. 그는 아무도 몰래 홍국영에 뽑혔다. 처음엔 본인도 몰랐다. 김근홍 감독, 이병훈 감독, 그리고 주요 제작진까지 3차 관문을 통과한 결과였다. 살아온 이야기도 했고, <대장금> <허준>의 주인공 남자 역할도 해보인 결과였다.


배우 생활 7년째지만, 아직 무명인 그에겐 파격이었다. 어쩌면 '발탁'이었다. 홍국영이 누군가? 세손 편에 서서, 오르내리는 극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책사'였다. 그는 무술을 배우고 승마를 배웠다. 영조와 정조시대 책을 읽었다. 홍국영에 대한 만화책도 봤다. 하지만 이전에 홍국영을 그린 드라마는 보지 않았다. 이병훈 감독 엄명이었다.


"홍국영이 나온 드라마, 절대 보지 마라. 그거 답습해서 비스무리하게 만들거나 하지 마라. 네 것을 해라."


드디어 대본 연습 시간이 돌아왔다. 10회였다. 홍국영이 첫 등장하는 신이었다. 그리고 '무지 잘했다'가 아니었다. 무지막지하게 혼이 났다.


"대본 딱 들어갔는데, 한 줄을 못 넘기는 거예요. 한 단어 읽으면 감독님이 '그게 아니지.' 아냐. 그게 아냐. (말투가?) 네. 말투가. 시니컬해야 하는데 전 너무 사극처럼 만들어왔던 거죠. 누군가를 따라하는 느낌이 막 드신데요. 왜 그렇게 만들어왔냐고, 네 것 하라고, 네 평소하던 대로 해봐!"


대본 연습이 끝나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떨렸다. 하지만 배에 힘을 주고 일어났다. 그는 생각했다.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돼.


홍국영은 어려운 말도 유창하게 좔좔좔 읊어야 했다. 홍국영은 똑똑한 사람, 천재였으니까. 그렇다고 감정 없이 줄줄 읊어서도 안 됐다. 템포를 살려야 했다. 그걸 찾아야 했다. 너무 힘들지만 찾아야 했다. 대본을 정말 많이 봐야 했다. 봐도 봐도 부족했다. 해도 해도 혼이 났다. 발음 때문에, 너무 느려서, 너무 빨라서……. 힘들었다. 대본만 나오면 입에 펜을 물고 대사를 연습했다. 또 감독은 그에게 전체를 보라고 했다. 그러다 슬슬 코드가 맞아가는 게 보였다. 많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하얀 거탑> 할 때는 수술도구까지 다 외웠어요. 수술실 들어가서 막 공부하고요. 똑같이 해야 된다구……. 감독님이, '야. 너네, 의사야. 한상진이 아니라 이제 의사가 된 거야. 의사들이 봤을 때 니네가 진짜 의사 같아야 우리 대화가 진짜 대화가 되는 거지. 안 그럼 우리 것은 흉내 내기야.'


가끔 저도……. 이럴 때도 있죠. '내가 왜?' 그런데 방송 나오는 거 보니, 딱 알겠더라구요. 감독님 생각이 맞았구나. 내가 착오가 있었구나. 아! 시니컬하게 표현하란 게 저런 거구나."


 
<이산>에서 홍국영으로 활약하는 한상진.
ⓒ 오마이뉴스 김정훈

유시민에게서 홍국영의 향기가?


실제 <이산>에서 홍국영이 튀는 이유가 그랬다. 홍국영의 시니컬함, '냉소'는 빛났다. 홍국영은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거침없이 말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후겸 앞에서도 "개를 따라다니면 측간을 가고, 범을 따라다니면 숲을 얻기 마련"이란 소릴 천연덕스럽게 내뱉었다. 사극 인물 같지 않았다. 말투도 그랬다.


"제가 홍인한 대감을 찾아가서 그러잖아요. '아. 제가 좀 기다려야 되겠네요.' '무슨 날을 기다린단 말인가?' '대감께서 돌아가실 날 말입니다.' 이것도 전 처음에 심각하게 했더니, 감독님이 '아니야. 홍국영은 이런 말도 굉장히 시니컬하고 무표정하게 할 거야. 걘, 간이 배 밖으로 나왔거든.'


홍인한이 정1품 대감이고, 홍국영은 정7품인데, 지금 7급 공무원이 1급 장관한테 가서 '나 안 키워주면, 당신 죽는 날까지 기다리고 볼 거야.' 이러는 거잖아요. 홍국영은 굉장히 시니컬하면서 사회 비판적이지만, 기회를 노리며 탁 숙이고 있다가 언젠가 기회가 오면 기회를 잡으러 들어가는 인물인 거죠."


김근홍 감독이, 이병훈 감독이 그에게 말했다. 대수랑 이야기할 때도, 시니컬한 사람이 그렇게 얘기할까? 그렇게 헤헤 웃을까? 왜 자꾸 뭔가를 만들고 다른 사극처럼 똑같이 가려고 하냐? 네 캐릭터를 버리지 마라. 화학조미료 같은 걸 자꾸 넣으려 마라. 원래 만든 대로 해라. 너무 많은 걸 하려고 하지마라.


그런데 이렇게 시니컬한 사람, 혹시 롤모델이? 혹시 참고한 사람이 없었나? 물론 흔하진 않았겠지만.


"유시민…….(웃음) 김근홍 감독님이 시니컬한 사람으로 최고라고…….(웃음) 그런 거 같기도 해요. 그분은 도무지 속을 모르겠어요. '돌발영상' 봐도 그렇고, 기사를 봐도 그렇고. 그분이 어쩌면 홍국영 같기도 해요. 돈키호테 같기도 하고.


옛날 영상, 봤어요? 유시민 의원이 처음 국회의원 됐을 때, 정장 안 입고 국회에 들어간 거 있잖아요? 그 장면이 너무 시니컬한 거예요. 일단 딱 올라가, 사과하고……. 다른 국회의원들이 뭘 막 던지고 그러는데 그 분, 진지하시더라고요. 그 장면이 너무 웃긴 거예요. 어우! 그 시니컬함! 홍국영이 아마 조선시대가 아니라 현대라면 저렇게도 될 수 있겠다."


내가 원래 시니컬하고 많이 비판적인 사람


그런데 그는 어쩌다 배우가 됐을까? 어려서 그의 집안은 극과 극이었다. 받아쓰기 시키고 영어 시키던 친가와 달리 외가에 가면 노래하고 밤새도록 노는 분위기였다. 알려진 대로 현미가 그의 이모고 노사연이 사촌 누나인 집안이니, 어쩌면 당연했다. 가족들이 모두 TV에 나오는 분위기였다. 어린 그도 막연히 TV에 나오고 싶었다.


 
<하얀거탑>에 이어 <이산> 홍국영을 연기하는 한상진.
ⓒ 오마이뉴스 김정훈

"현미 이모는 지금도 그래요. 넌 끼가 없고 네가 연기하는 거 보면 신기해. 지금도 집안에서 어른들이 노래시키면 못해요. (진짜?) 정말 못해요. 그러니까 제가 연극무대 섰을 때 현미 이모가 보시고 기립 박수를 쳤어요. <오셀로> 할 때 오셨는데, 기립 박수 치고 우셨대요. 너무 감동해서……. 야. 저 놈이……."


대학 방송연예과 졸업 직전, 시험에 붙었다. 아니 뽑혔다. SBS 톱 탤런트 대회였다. 지금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같은 대회였다. 경쟁률이 3천 대 1이었다. 드라마에 고정 출연했다. 배역에 이름도 있었다. 금방 주인공이 될 줄 알았다.


"그땐 약간 교만했죠. 전 연기를 잘 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정작 주어지니까 연기를 못하더라구요." 그가 시니컬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회가 왔는데 못 잡으니까 도태되는 거예요."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 <청혼>을 찍었다. 중간에 연극도 했다. 들어오지 않는 배역을 마냥 기다리며 놀 순 없었다. <리어왕> <오셀로>……. 오셀로를 하느라, 20kg을 찌웠다. 그래도 연극이 좋았다. 정말 좋았다. 무대 하나가 끝날 때마다 관객들 에너지가 쑤욱 들어왔다. 공연 끝나면 선배들과 이야기도 많이 했다. 그때였다. 소개팅을 했고,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농구 선수 박정은이었다. "한 분야에 최고를 이룬 사람"이었다. 그리고 2004년에 결혼했다.


아내는 지금 합숙중이다. 얼굴 보기 힘들다. 아무리 국가대표급 농구선수지만, 그도 아내가 집에서 기다렸다가 따뜻한 밥을 해주길 원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 안 했을까? 그가 딱 잘라 말했다.


"결혼할 때 그걸 알고 결혼했잖아요. 처음에 저도 그런 거 때문에 투정을 부리고 그랬는데, 누가 그러더라구요. 박정은이란 사람은 한상진의 아내일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박정은이다. 태극마크는 아무나 다냐? 넌 연기하면서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지 못 하잖냐? 어우. 욱 하더라구요. 그럼 나도 양복에 태극기 마크 달겠다. 그런 게 어딨냐. 그런데 태극마크를 단다는 것, 어느 한 분야에 베테랑인 거 쉽지 않잖아요. 그런 데 있어선 대를 위해 소가 희생하는 거죠."


다 접고 갔던 미국, <하얀 거탑>으로 돌아오다


지난 해, 그에게도 회의가 찾아왔다. <백만장자와 결혼하기>가 끝난 뒤였다. 할 일은 없고, 답답했다. 그리고 막막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미국에 가자. 한 3, 4년 공부라도 해보자. 눌러앉을지도 몰랐다. 미국에 갔다. 그때였다. 미국으로 전화가 왔다. <하얀 거탑> 오디션을 알리는 전화였다. 가슴이 쿵 했다. 제일 빠른 비행기를 탔다.


"안판석 감독님께 물어봤어요. 왜 저를 뽑으셨어요? 강렬했대요. 제가 인상이. 머리가 그때 빡빡이었거든요. 또 오디션에서, 제가 제일 잘 했대요. 말도 조리 있게 잘했고……. 연기란 그런 거 같아요. 스타니슬라브스키 연기론이, 연기는 삶이다. 연기는 곧 인생이다. 인생은 연기고. 그런 것처럼 살아온 환경을 보면 그 사람 연기가 보인대요. 대사를 아무리 몇 백 번 읽어도, 살아온 환경과 말투를 보면 알 수 있대요."


그는 자신이 시니컬하고 많이 비판적인 사람이라고 했다. 데뷔한 지 시간이 좀 지나고, 그래도 자기 위치를 못 잡아 마음속에 스며든 서러움 같은 게 있다고 했다. 응어리? 한? 자괴감, 아픔도 있다고 했다. 그는 농담처럼 자신이 7년간 '집안 탤런트'였다고 말했다. 집안 사람들만 아는 탤런트. 그리고 생각했다. 그런 아픔들이 모아지면, 좀 더 좋은 연기가 나오지 않을까? 잘 이용하면?


그래서였을까? <하얀 거탑>에서 그가 왠지 눈에 띈 게? <하얀 거탑> 때, 그는 아예 이천 세트장에서 살았다. 먹고 자고, 진짜 의국장처럼 살았다. 숙직실에서 누워있다, '와라' 그러면 뛰어가 머리가 눌린 채로 촬영했다. 원래 의사가 그러니까. 행복했다. 많은 걸 배웠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나? <하얀 거탑> 안판석 감독은 칭찬을 잘 했다. 칭찬은 그를 춤추게 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나눠줄 줄 아는 배우들을 만났다. 드라마는 혼자 잘 하는 게 아니라, 함께 잘해야 한다는 걸 그때 배웠다. 또 김명민은 그에게 '연기'를 알려줬다. (연기를) 넘치게 하지마라. 모자란 게 좋은 거다.


"그제 명민이 형이 전화해 그러더라구요. (촥 가라앉은 말투로) 국영아……. 네가 활약이 크구나. 형이 잠깐 영화를 할 때……. (웃음)"


 
<이산> 홍국영을 맡은 한상진. 그는 전에 <하얀거탑> 의국장이었다.
ⓒ 오마이뉴스 김정훈

다른 생각? 다음 생각? 그럴 겨를이 없다. <이산>은 60부작이다. 갈 길이 멀었다. 아직 반도 가지 않았다. 파란만장 홍국영? 멀었다.


"다른 걸 생각할 수가 없어요. 홍국영 역에 올인 해야 하구요. 확실하게 소화를 해서, 시청자들도 이해할 수 있고 동정할 수 있고 그런 홍국영을 만드는 게 저한테 가장 큰 급선무고요. 그 다음에 이거 올인 하고 났을 때, 나중에 올 허탈감을 줄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하얀 거탑>의 옛날 주인공 배우는 드라마가 끝나자마자 그 다음날 자살했거든요. 진짜로! 명민이형도 그랬어요. <하얀 거탑> 끝났는데 그날 밤에 자살충동을 느꼈다구요. 너무 몰입해서요. 드라마에서 자기 배역이 죽으면 아주 우울해요. 저도 그럴 거 같아서…….


그런데 그래야지 정상인 거 같아요. 저를 믿고 선택해준 분들 위해서라도 그 정도는 해야죠. 저를 믿고 의지하는 제 가족들...  (숨을 내쉬며) 하아. 어깨가 무겁죠. 그러니까 허튼 생각을 할 수 없어요. 저한텐 목이 칼에 딱 요기 이렇게 와있어요.”


서른 살! 그는 두려움을 딛고 잔치를 여는 중이었다.

-- 출처 : 오마이뉴스(www.ohmynews.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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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다할아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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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산> <이산>의 월페이퍼
ⓒ iMBC
 

조선왕조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을 고르라면 역시 '사도세자 폐사 사건'입니다. 일국의 세자가, 그것도 아버지에 의해 쌀궤짝에 갇혀 죽은 것입니다. 세자의 품위에 걸맞지 않은 아주 비참한 죽음이죠.


이 사건을 후세에 가장 명확히 전해주는 사료는 역시 <한중록>입니다.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가 한글로 저술한 책입니다. 가장 가까이서 사건을 지켜본 사람의 기록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널리 전해진 사료입니다.


하지만 이 <한중록>은 자세히 뜯어보면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조선의 역사에 걸쳐 가장 영특한 임금 중 1명으로 평가받는 영조, 그리고 어릴 때부터 신동의 자질을 발휘했다는 사도세자. 이 부자가, 사도세자가 점점 머리가 커짐에 따라 일종의 '정신병 촌극'을 벌였다는 것입니다.


<한중록>을 잘 보면 영조는 '치매노인' 쯤으로 그려지며, 사도세자는 조울증과 편집증 등 다양한 정신병 질환에 시달리는, 말 그대로 '정신질환자'입니다.


혜경궁 홍씨에 따르면, 조선 후기 르네상스의 기초를 닦은 임금 영조가 시종일관 콤플렉스가 범벅이 된 성격이상자였으며 치매노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정신병에 시달리는 부자에 의해 조선 후기 르네상스의 기초가 시작됐다는 것입니다. 너무 극단적입니다.


사학자 이덕일은, 혜경궁 홍씨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사도세자의 비극'에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정치논리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저 유명한 '예송논쟁'과 '장희빈'을 기억하면 이 주장이 일리있다는 판단도 들 것입니다. 앞서 벌어졌던 '예송논쟁'과 '장희빈' 모두 당파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엇갈린 정치적 사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도세자 '왜' 죽었을까


영조의 배다른 형 경종은, 과거에 자신의 어머니 '장희빈'을 죽이는 데 앞장선 집권당 노론을 일시에 몰아낼 기회를 노리던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합니다.


곧바로 '독살설'이 제기됐고, 주범으로는 노론과 노론이 임금으로 밀던 '연잉군(영조)'이 지목됩니다. 연잉군은 배다른 동생으로, 자식이 없던 경종이 사망할 경우에는 왕위계승 1순위였던 왕세제였던 것입니다.


'경종독살설'은 당시에 전방위적으로 펼쳐진 의혹이라고 합니다. 성벽과 마을에는 온갖 '괘서'가 붙여졌었고, 소론 계열의 이인좌는 경종의 위패를 들고 반란까지 일으킵니다.


총체적인 위기였죠. 역사적으로, 영조는 이때부터 '탕평책'을 주장합니다. 자신의 원수나 다름없던 소론도 조정에 기용하면서 노론과 소론의 조화를 추진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왕이든 뭐든 자신을 충실히 지지할 수 있는 집단을 편애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조는 왕이지만 그 역시 사람입니다. 게다가 배다른 형을 독살했다는 소문에 노론이같이 연루됐기 때문에 심리적인 공감대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세자는 바로 아버지가 연루된 '큰아버지의 독살설'을 거론하며 대들었다가 비참하게 죽었다는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사도세자는 소론 계열 선비들에게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노론이나 영조로서는 그를 좌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결국, 자신의 아버지에 의해, 노론의 중진이었던 자신의 처가가 앞장서면서, 그리고 자신보다 친정을 더 따르던 아내 혜경궁 홍씨의 방관 아래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의 한을 기억하는 이는 단 한 명, 바로 11살의 나이로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세손 '산(?)'이었습니다.


비극적인 어린 시절, 위태로웠던 즉위 과정


노론으로서는 당연히, 세손의 즉위를 막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옵니다. 왕위에 즉위해서 아버지의 복수를 하겠다고 벼르면 꼼짝없이 죽어야 할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손은 심지어 궁궐을 넘어들어오는 자객까지 맞이하는 등 극단적인 처지에 빠집니다.


주변에는 누구도 도울 사람이 없었습니다. 외할아버지의 동생 홍인한마저도 폐세손을 주장했고, 고모 화완옹주는 양자 정후겸의 왕위 즉위를 추진하면서 역성혁명까지 꿈꿉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혜경궁 홍씨가 '모정(母情)'은 잊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아들만큼은 철저히 보호했으며, 기어이 왕위에 오릅니다. 하지만 영조가 일찍이 잃은 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됨으로써 즉위한 정조는, 10여년을 참았던 한 마디를 내뱉는다고 하죠. 아주 비장합니다.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로다."


결국 선전포고였습니다. 정조와의 개인적인 원한을 차치하더라도, 영조의 편애 아래 수십년을 독주했던 노론은 정치적으로도 경장(개혁)의 대상이었으며, 조선 팔도에 걸쳐 어디에든 그들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전방위적으로 힘을 과시하는 구체제는 제 아무리 왕이라 할지라도 쉽게 타파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가장 결정적으로 자신을 방해할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 역시 노론 중신 가문의 딸이었기 때문에 사이가 좋을 리는 결코 없었던 것입니다.


드라마 <이산>이 다룰 이야기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누구보다 비극적인 성장기를 보냈고, 어렵게 왕위에 즉위해서도 평생을 구체제와의 갈등으로 소모한 '정조'의 이야기죠.


<이산>, <한중록>과 <사도세자의 고백>의 타협


"사도세자는 당쟁의 희생양"이었다는 주장은, 이덕일의 <사도세자의 고백>을 통해 구체적으로 거론됩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덕일은 <한중록>에 대한 전면 비판으로 색다른 시각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다룹니다.


<이산>은 1, 2회에 걸쳐 사도세자의 죽음을 다뤘습니다. 정조를 이야기하자면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이죠. 하지만 <이산>은 '타협'을 추구합니다. <이산>에서는 사도세자가 왜 쌀궤짝에 갖혔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산>의 홈페이지에 공개된 '등장인물의 관계' 등에 대한 설명에서, <이산>이 어떻게 '타협'했는지는 잘 드러납니다.


먼저, 앞장서서 '폐세손'을 주장했던 홍인한이나 화완옹주, 그리고 정후겸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대결구도'를 굳혀놨습니다. 하지만 가장 예민한 '혜경궁 홍씨'나 '홍봉한'에 대해서는 역시나 <한중록>을 따른 것 같았습니다.


그들의 역할이 구체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누구보다 중요할 이 캐릭터들은 존재감도 희미하며, 어딘가 어색합니다.


물론 그네들에게도 "세손이라도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홍인한의 적극적인 움직임을 사실상 방치했던 점으로 봐서는 그네들 역시 최소한 사도세자의 죽음에 있어서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손댄 일이 자신의 외할아버지와 작은 외할아버지를 각각 귀양보내거나 사약을 먹인 일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홍봉한 역시 뭔가 모종의 역할을 했던 것을 유추할 수도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친정을 지키려는 혜경궁 홍씨와의 정조의 갈등 역시 만만치 않았다고 하는데, 이쯤 되면 우리는 역시 그동안 계유정난이나 중종반정을 다룬 사극에서 느낀 역사의 교훈을 한번 더 느끼게 됩니다.


"권력은 피도 눈물도 없습니다"


<이산>도 팩션 사극


<이산>도 팩션 사극을 표방합니다. 정조의 그림자처럼 그려질 '박대수'나 성장과정이 기록되지 않은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 등이 정조가 세손이었을 당시에 인연이 이어져 삼각관계를 이룬다는 식의 이야기가 추가된 것입니다.


물론, <이산>의 팩션은 실록에 기록된 인물의 탄생시기까지 조절한 <왕과 나>와는 달리, '고증'을 중시하는 일부 시청자들의 반발을 살 우려는 적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정사에 기록된 틀 자체가 바뀔 정도의 '팩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팩션'보다 중요하게 여겨야 할 점이 있다면 이순재의 '영조' 연기일 것입니다. 사도세자 폐사 당시 그는 이미 일흔에 가까워졌고, 40년 가까이 왕위를 지킨 대정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산>에서 신하들이 감히 대꾸조차 못할 정도로 엄격한 임금으로 그려지는 모습이 일리가 있는 것입니다. 정치밥 40년이라. 게다가 자신을 둘러싼 "배다른 형을 죽였다"는 소문과 그로부터 촉발된 역모까지 제압한 입지전적인 임금입니다.


<이산>에서 그가 왜 사도세자를 죽였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의 묘사가 궁금해지는 일면도 있습니다. <한중록>에서는 사도세자 폐사 이후의 영조를 철저하게 치매노인으로 묘사합니다.


하지만 민감한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기 때문에 <이산>으로서는 묘사의 폭을 넓힐 수 있다는 효과를 얻었습니다. <거침없이 하이킥>으로 더 확실한 탄력을 얻은 이순재의 노장 연기를 기대해볼 수 있는 여지도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재미있는 것은, 실제로 정조의 최대 적수였던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가 사라지고, 최석주라는 가공인물이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영화 <영원한 제국>을 보신 분이라면, 최종원이 기가 막힐 정도로 연기한 심환지의 이미지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싹 마른 노인 이미지의 '심환지'가 풍체 넉넉한 중견연기자 조경환을 만나 전혀 상반된 캐릭터 '최석주'로 변신한 것, 어떤 의도일지는 모르겠습니다. 꽤 궁금해집니다.


비극의 임금, 왜 호기심이 느껴질까


<왕과 나>에서는 '예종독살설'을 묘사하면서, 그리고 선대의 공신들에 둘러싸인 성종을 그리면서 구체제와 싸우려다 실패하거나 좌절하는 임금의 초상을 그려나갑니다.


이런 식의 이야기는, <용의 눈물>이나 <장희빈>과 같이 임금의 절대적인 힘을 이야기하던 지난 10년간의 사극 패턴과는 또다른 이야기 구도입니다.


'왕'이라는 인물의 오래된 인식에서 벗어나 보다 섬세하면서도 고뇌에 휩싸이는 '인간'을 더 주목하는 경향이 통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죠. 이미 종영된 <한성별곡-정>도 '경장'을 주도하면서 사실상 좌절하는 정조의 내면을 잘 드러냈던 적이 있습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연개소문>과 같이 절대권력자를 묘사한 사극이 유행했고, <주몽>이나 <대조영> 같은 창업군주를 다룬 사극이 유행했다는 것을 기억해본다면 이건 또다른 변화라는거죠. 사극, 이렇게 점점 섬세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 출처 : 오마이뉴스(www.ohmynews.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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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도전>의 성공법칙 첫 번째는 끊임없는 도전과 변화이다.
ⓒ IMBC
 

드라마에도 시기마다 시청자들이 선호하는 바가 있고, 그것에 따라 조금씩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변화한다. 그러한 면에서 볼 때 예능프로그램의 변화는 드라마 쪽보다 속도가 빠르고, 쉽게 변화해야 오래도록 인기프로그램으로 장수할 수 있다.


그래서 장수하는 프로그램은 한 포맷으로 몇 십년 유지한 것이 아니라 시기마다 적절한 변화를 꾀하며 포맷에 변화를 주어 살아남았다. 가령 <일요일 일요일 밤에>는 몰래카메라로 인기를 얻은 뒤, 양심냉장고, 인간극장 등의 포맷으로 꾸준한 변화를 시도했고, 그것이 시청자들에게 눈길을 끌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실 예능프로그램은 드라마보다 더 치열한 전쟁터인지도 모르겠다. 그중에서 시청자들의 변화의 흐름에 부흥하는 프로그램이 바로 <무한도전>이다. 어쩌면 그러한 흐름의 변화를 보여주는 유일한 프로그램일지도 모른다. 특히 그러한 변화를 몸소 선도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무한도전>의 인기는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가령 <상상플러스>를 보자.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프로그램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래서 예능프로그램도 KBS가 장악하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노현정 아나운서를 앞세운 <상상플러스>는 '세대공감 올드 앤 뉴'는 전성기를 구가했다.


사실 <상상플러스>는 스타를 초대해 네티즌들의 댓글을 읽어주는 형식으로 처음 안방극장을 찾았고, 두 번째 변화를 꾀한 것이 바로 '세대공감 올드 앤 뉴'였고, 그것이 안방극장에 거센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지금은 그 프로그램의 포맷에 변화를 주는데 실패해 인기가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매주 <무한도전>은 우리에게 어떠한 내용을 가지고 안방극장을 찾을지 기대감을 부풀어 오르게 하며, 시청률이 간혹 20%를 넘는 수준이지만 체감 시청률은 최고라고 할 수 있다. 케이블 TV에서 어느 채널에서 무한재방송을 하는 걸 보면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그리고 매주 새로운 포맷으로 우리의 기대에 부흥하고 있는 <무한도전>의 생존 필사기는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끊임없는 도전이 만든 변화의 웃음!


<무한도전>은 사실 '세대공감 올드 앤 뉴'의 형식을 따라하고 싶은 마음에 '마봉춘'을 등장시켜 비슷한 포맷을 유지하되, 그 퀴즈의 수준은 상당히 유치할 정도의 것들로 구성했다. 그래서 장시간 그러한 포맷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무한도전>은 매주 조금씩 다른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무한도전>은 생존하고자 매주 네티즌들의 반응을 살피며 비난에 가까운 힐난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조금씩 수정․보완해 나갔다. 그것이 <무한도전>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방법이지만 지금의 성공요인으로 작용한다.


즉 그러한 프로그램의 포맷을 보완하면서 매주 다른 포맷으로 변화를 주게 되었고, 결국 <무한도전>은 어떠한 기본적인 포맷이 없는 예능프로그램으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때문에 어떠한 포맷을 끌어와도 모든 걸 소화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성장했다. 아마도 <무한도전>이 사랑받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포맷 자체가 열려있다는 점일 것이다. 


물론 정해진 것이 없다 보니 사실상 매주 네티즌들의 호응을 얻는 것은 아니다. 때론 비난의 목소리도 듣기도 하고, 때론 호평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 사실상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제작진은 물론이고, 출연진들도 힘이 들 수밖에 없다. 늘 위기를 맞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무한도전>은 그 위기를 기회로 만들고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을 얻었다. 그것은 끊임없이 도전하는 그들의 실험정신 덕분이다. 사실 예능프로그램에서 주로 꽁트, 퀴즈 등의 형식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해 출연해도 정식 패션쇼에 모델로 도전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6명의 멤버 모두 '웃겨야 산다'를 좌우명으로 가진 듯 웃기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는다.
ⓒ IMBC

그런데 <무한도전>의 멤버들이 이상봉 디자이너 쇼 무대에 출연해 모델로 나가 당당한 워킹을 선보였다. 그리고 모델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신선한 반응을 이끌어 냈고, 시청자들은 그들의 도전에 박수를 보냈다. 이처럼 아무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무한도전>은 무모할 만큼 도전정신이 투철하다.


물론 그래서 때로는 오히려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대부분 그들의 도전은 칭찬을 받는다. 적어도 그 도전하는 정신만큼은 프로그램의 재미와는 별개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도전은 참 많다. 방송국 앞에서 잠을 잔다든지, 드라마 형식으로 꾸민다든지, 버스로 서울구경을 하러 간다든지 하는 등의 도전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웃음 경쟁, 빛을 발하다!


그러한 도전 정신을 바탕으로 사실상 6명의 멤버들이 각자 하나의 캐릭터로 설정해 보여주는 개그는 이제 친숙할 대로 친숙하다. 그래서 그들이 무얼해도 시청자들은 웃는다. 정형돈이 어설픈 개그를 해도 웃고, 박명수가 여전히 자신을 거성으로 지칭하며 호통개그를 해도 웃는다. 그만큼 <무한도전>의 변화는 시청자들에게 이젠 익숙한 패턴으로 다음 주에는 무엇을 할까, 하는 기대를 자연스럽게 품게 만드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에 6명의 멤버들은 사실 고통스럽겠지만 '웃겨야 산다'를 좌우명처럼 여기는 듯한 인상이 풍길 정도로 모두들 몸을 사리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은 모두가 서로서로 친하지만 끊임없이 웃음을 경쟁하고 날이 갈수록 재미를 더한다.


 
<무한도전>의 변화는 오히려 예능프로그램의 변화를 선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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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6명의 멤버들은 고정적인 캐릭터를 구축해 그 안에서 웃음을 완급 조절해 나갔다. 가령 박명수는 거성으로, 정형돈은 어설픈, 노홍철은 돌아이로. 그래서 그 안에 고정적인 캐릭터를 완벽하게 구축해 놓고 일정하게 간극을 유지하면서 서로 힐난하거나 배신을 일삼으면서 웃음을 유발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무한도전>의 캐릭터를 다른 방송에서도 유지하면서 영역을 확대해 나갔고, 박명수는 유재석의 인기에 버금가는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들 표현대로 드디어 2인자가 된 것이다. 그런데 <무한도전>은 포맷 자체가 늘 변화하듯, 변화를 6명의 멤버들에게도 고스란히 적용했다.


그것은 바로 웃음경쟁이다. 힐난과 배신 등으로 웃음을 유발하더니 이젠 개개인이 서로를 경쟁상대로 여기고 서로 웃기려고 무진장 애를 쓰기 시작했다. 그 사이 몸개그가 다시 부활해 실미도편에서 자학적인 몸 개그를 보여주기도 했다.


'미스코리아', '워터보이즈'에서  몸 개그 경쟁을 펼쳤고, '강변북로 가요제', '서울구경'도 마찬가지다. 끊임 없이 웃음 경쟁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표면화한 것이 바로 '네 멋대로 해라'이다. 6명이 각자 6개의 코너를 연출하는 형식으로 정형돈이 연출한 '체인지'는 서로의 캐릭터를 바꾸어 얼마나 웃기는지 진짜 개그실력을 겨루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래서 정형돈이 연출한 '체인지'는 웃음경쟁을 하고 있음을 시인함과 동시에 그들이 시청자들을 웃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는지 간접적으로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이 빛을 발하며 6명 멤버가 보여주는 개그에 우리는 웃는다. 그리고 다음 주를 기대한다.


이 정도면 <무한도전>이 제목 그래도 끊임없이 도전을 펼치면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정당한 권리를 부여받았다고 해도 과장은 아니지 않을까. 다음 주에 펼쳐진 쇼는 무엇인지 그야말로 기대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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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의 일대기를 다룰 <태왕사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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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9월 10일 스페셜 방송을 시작으로 <태왕사신기>(연출 김종학 윤상호 극본 송지나 박경수)가 시청자 앞에 첫 선을 보인다. 거대한 스케일과 천문학적인 제작비, 그리고 한류스타 배용준의 캐스팅 등으로 화제를 낳은 <태왕사신기>는 네 차례나 방영이 연기되면서 많은 논란도 일으켜왔다.


이제 첫방송을 앞두고 다소나마 안정이 된 것처럼 보이지만 <태왕사신기>는 여전히 논란이 될 요소를 떠안고 있다. 지금부터 5가지 측면에서 <태왕사신기>의 문제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광개토태왕의 일대기를 24부에 제대로 담을 수 있을까?

 

우리나라의 사극은 보통 50~60부작 정도로 기획되어 방영이 되고 있다.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주몽>(연출 이주환 김근홍 극본 최완규 정형수 정인옥)이나 <여인천하>(연출 김재형 극본 유동윤)처럼 연장이 되어서 80부작 내지는 100부작 이상으로 중간에 변하는 경우도 있다. 아니면 <대조영>(연출 김종선 극본 장영철)이나 <불멸의 이순신>(연출 이성주 김정규 극본 윤선주)처럼 처음부터 100부작 이상으로 기획되는 작품도 있다.


이에 비해 <태왕사신기>는 24부작으로 앞서 언급한 사극들에 비하면 무척 짧은 편이다. 물론 <태왕사신기>처럼 짧은 사극이 그동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사 박문수>(연출 정인 극본 고동률 유진희)는 15부작이었고 최근 막을 내린 <한성별곡-正>(연출 곽정환 극본 박진우)는 8부작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런 작품들은 그 시대의 일부 에피소드를 토대로 구성한 드라마였기에 <태왕사신기>와는 성격이 다르다. <태왕사신기>는 광개토태왕이라는 인물의 일대기를 그릴 작품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24부작은 너무도 짧다는 느낌을 결코 지울 수 없다. 자칫 광개토태왕의 일대기를 제대로 담지 못하고 일부를 조명하는 데 그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낳게 하는 대목이다.


표절 논란을 완전히 잠재울 수 있을까?

 

<태왕사신기>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표절 논란에 휩싸였던 드라마이다. 인기 만화 <바람의 나라>의 작가인 김진씨는 <태왕사신기>가 자신의 작품을 표절했다고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김진씨의 말에 따르면 <태왕사신기>의 시놉시스가 작품의 줄거리와 패턴, 신시의 개념 사용, 사신(四神) 캐릭터 사용 등의 측면에서 볼 때 <바람의 나라>와 흡사한 점이 많다고 하였다.


그러나 재판부는 "두 저작물은 개략적 줄거리와 캐릭터 성격에 있어 일부 유사점이 있지만 원고 김진씨의 작품은 단행본으로 출간된 완전한 형태의 만화인 반면 피고 송지나씨의의 시놉시스는 최종 저작물이 아닌 앞으로 저술할 드라마 시나리오 개요를 정리한 것으로 '실질적 유사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말로 송지나씨의 손을 들어주었다.


표절 논란은 이렇게 하여 일단락되었지만 재판부의 판결은 만화와 시놉시스의 비교하였을 뿐이므로 완성된 드라마가 방영된다면 또 다시 표절 논란이 고개를 들 여지는 얼마든지 남아 있어 우려가 되고 있다.

 

역사 고증, 제대로 되었나?


 
역사 왜곡 논란을 불러일으킨 <태왕사신기>의 의복
ⓒ MBC
 

최근 몇몇 사극들이 이른 바 '퓨전사극'을 표방하면서 역사에 대한 고증을 무시한 채 드라마를 제작하여 역사 왜곡 논란을 낳고 있다. <태왕사신기> 역시 정통사극이 아닌 퓨전사극이기 때문에 이런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실제로 지난해 9월 스틸컷이 공개되자 타이틀롤인 배용준의 갈색 염색 머리와 온라인 게임 캐릭터를 연상시키는 두꺼운 갑옷을 두고 역사 왜곡 논란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광개토대왕의 머리가 갈색이란 설정과 두툼한 철판을 이어붙인 듯한 갑옷에선 역사 고증의 흔적을 전혀 찾아보기 어렵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실제 고구려 갑옷은 비늘같은 쇳조각을 촘촘히 이어붙여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 산성에 대한 고증 면에서도 <태왕사신기>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태왕사신기>는 막대한 제작비를 바탕으로 중앙아시아 키르키즈스탄에서 드라마의 상당 부분을 촬영하였다. 그러나 그 지역에는 고구려 산성이 아닌 평지 성이 있을 뿐이기 때문에 여타 다른 고구려 사극처럼 논란에 휩싸일 여지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중앙아시아 키르키즈스탄에서 촬영된 모습
ⓒ MBC
 

 

고구려 사극의 중복, 흥행에 문제 없을까?

 

2006년 <주몽>을 시작으로 우리나라 사극은 '고구려 붐'이 일어났다. <주몽>에 이어 <연개소문>(연출 이종한 극본 이환경)이 고구려 사극의 바통을 이어받았고 <대조영>이 그 뒤를 이어 여전히 인기리에 방영 중이다.


그러나 요즘 들어 고구려 사극이 너무 오래 방영되어 시청자들이 다소 식상해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시대 사극으로의 회귀가 이어지고 있다. 최근 방영되거나 방영 예정인 사극인 <왕과 나>(연출 김재형 손재성 극본 유동윤)와 <이산>(연출 이병훈 김근홍 극본 김이영), <대왕 세종>(연출 김성근 극본 윤선주) 등이 조선시대로의 유턴을 이끌고 있는 작품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또 다시 고구려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태왕사신기>의 방영은 흥행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방송계에는 시청자가 선호하는 트렌드라는 것이 있는데 지금 <태왕사신기>는 그 트렌드에 역행하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일본 자금 유입설에 대한 찜찜함, 불식시킬 수 있을까?

 

 
<태왕사신기>에서 광개토태왕 역을 맡은 배용준
ⓒ MBC
 

<태왕사신기>에는 앞서 말했듯이 천문학적인 제작비가 든 작품이고 그 액수는 430여억원 정도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일본 자금이 유입된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고 있다.


이런 소문에 대해 제작사인 김종학프로덕션에서는 제작비로 일본 자본이 유입됐다는 것은 잘못된 이야기라고 하면서 국내 금융권과 개인 투자자를 통해 조성된 것과 일본에 <태왕사신기> 관련 컨텐츠를 선판매하여 자금을 모았다고 밝힌 바 있다. 일본에서 제작비를 투자받은 게 아니라 순수하게 <태왕사신기>를 미리 수출하여 번 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전 여류 비행사 '박경원'이라는 인물의 삶을 그렸던 영화 <청연>(감독 윤종찬)이 지금의 <태왕사신기>와 비슷한 논란에 직면한 적이 있다.


온라인 상에서 네티즌들이 박경원이라는 인물의 친일 행적을 파헤쳤고 이것이 친일 영화라는 소문과 일본 자금 유입설로 번졌다. 결국 <청연> 관람 금지 운동까지 펼쳐지며 120억을 들인 대작은 흥행 참패를 하고 말았다.


물론 <태왕사신기>는 <청연>처럼 친일 행적이 있는 인물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에서 인기가 높은 한류스타 배용준의 출연 때문에 이런 소문이 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제작사 입장에서는 이런 소문이 결코 좋을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그 찜찜함을 하루 빨리 불식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태왕사신기>는 우리 민족의 최고의 영웅 중 한 명이라고 일컬어지는 고구려의 제 19대 태왕인 광개토태왕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이다. 그런 만큼 시청자들 역시 기대가 무척 클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여러가지 우려 속에서도 <태왕사신기>에 많은 관심을 보일 것이다. <태왕사신기>가 이런 우려를 보란 듯이 떨치고 흥행과 작품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데 성공할 수 있을지 다음주를 주목해보자.

-- 출처 : 오마이뉴스(www.ohmynews.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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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시작된 SBS 드라마 <왕과 나>.
ⓒ 김종성
 

최근 시작된 SBS 드라마 <왕과 나>에 나타난 내시는 독자적 이해관계를 구축하면서 왕권을 위협하는 이미지를 띠고 있다. 중국에서는 내시 대신 환관이라는 표현이 주로 사용되고 있다.


1, 2회에서는 세조에 이어 새로 즉위한 예종이 집권 초기부터 내시부 개혁에 착수하자, 이에 맞서 판내시부사 조치겸(전광렬 분)이 왕권에 맞서 활로를 모색하는 장면이 방영되었다. 물론 드라마에서 말이다.


<왕과 나>에 전형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은 내시를 '궁중에서 왕권을 위협한 존재'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중국역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환관의 폐해'니 '환관의 농간'이니 하는 표현이 그런 인식을 더욱 더 부채질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내시제도가 본래 어떤 정치적 기획 하에서 출발한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내시가 왕권을 위협했다는 일부의 통념이 그리 근거가 없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사실, 내시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인식은 다분히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형성된 측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시제도가 왕권과 관련하여 어떤 기능을 갖고 있었는가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유용한 사례가 있다. 그것은 바로 오스만제국(1299~1922년)의 궁정노예제도다.


2001년에 이하라 히로시가 짓고 벤세이출판사(일본)가 펴낸 <지식인의 제상>에 실려 있는 스즈키 다다시(도쿄대 동양문화연구소) 교수의 '오스만제국에 있어서 지(知) 및 권력의 담당자와 정치과정의 변용'이라는 논문에는 과거 오스만제국의 왕들이 궁정노예를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오스만 궁정에 있던 노예신분의 남자들은 동아시아의 내시와 '신분적’으로 다를 게 별로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오스만제국의 궁정노예들이 거세를 했는지에 관해서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오스만제국의 궁정노예들이 내시와 같았다는 말은 '신체적'으로 그렇다는 게 아니라, 궁궐에 사는 왕의 남자 노예라는 '신분적' 조건이 같다는 의미다. 


술탄(오스만제국 군주) 전제정치가 확립된 15세기 후반부터 오스만제국의 통치구조에는 특이한 현상이 나타났다. 군주 전제정치가 확립되었으니 술탄이 전면에 나섰을 법한데, 도리어 술탄은 뒤로 물러나고 엉뚱한 제3자가 권력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그 제3자라는 것은 술탄의 절대적 대리인으로서의 영향력을 가진 대재상(국무총리)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대재상들의 대부분이 귀족이나 관료 출신이 아닌 궁정노예 출신이었다는 점이다. 한국이나 중국식으로 표현하면, 내시 혹은 환관들이 국무총리를 맡은 셈이다.


오스만제국의 술탄들이 궁정노예에게 대재상을 맡긴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이는 그만큼 술탄의 권력이 귀족의 권력을 능가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이러한 제도를 통해 술탄들이 자신의 정치적 책임을 절대적 대리인인 대재상에게 떠넘기려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아무런 권력기반이 없는 궁정노예에게 대재상직을 맡김으로써 대재상의 권력이 강화되지 못하도록 하는 동시에, 귀족들의 권력도 견제하고 술탄 자신의 권력도 강화시킬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처럼 전제정치가 확립된 15세기 후반부터 오스만제국의 술탄들은 자신의 측근인 궁정노예들을 권력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귀족들을 견제하는 한편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


 
창경궁 명정전에 있는 보좌. 내시는 보좌를 위협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를 보좌하는 존재였다.
ⓒ 김종성
 

한국과 중국의 내시제도도 유사한 취지를 갖고 있었다.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취지에서 남자 노예들을 궁궐에 두었던 것이다.


전통시대에 군주는 기본적으로 백성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군주는 귀족의 압제로부터 백성을 보호하는 '호민관'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군주가 귀족들과 한패가 되어 백성을 압제한 사례는 잘 발견되지 않는다.


천명사상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동아시아의 군주들은 기본적으로 천(天) 즉 민(民)에게 권력의 정통성을 두고 있었고, 이러한 이념에 따라 동아시아에서는 군주와 귀족 사이에 일종의 이념적인 대립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에 왕권과 재상권 사이에 대립이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백성에게 권력의 정통성을 두었다고는 하지만, 귀족세력과 대립하고 있는 군주는 본래 외롭고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랬을까? 왕실이 있다고는 해도 수적인 면에서 군주는 귀족세력에게 밀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주 편이라 할 수 있는 백성은 멀리 있고 군주의 대립자인 귀족은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백성에게는 별다른 사회적 권력(경제력·군사력·정보력)이 없지만, 귀족에게는 그런 무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백성은 조직화되어 있지 않지만, 귀족은 비교적 조직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군주는 귀족과의 대결에서 고독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군주에게는 또 다른 '힘 있는 남자'들이 필요했다. 그들이 바로 내시이고 환관이었다.


내시를 '힘 있는 남자'라고 하니까, 표현이 좀 어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시들은 정말로 힘 있는 남자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군주의 통치를 보조하는 데에 필요한 여러 가지 기술적 지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군주를 보좌하도록 훈련받은 사람들이었다.


군주의 입장에서 볼 때에, 충성스러운 관료보다는 충직한 내시가 더 믿을 만한 존재였을 것이다. 동아시아 전통시대의 관료들은 대개 귀족이나 사대부 출신의 유교적 지식인들이었다. 그런데 유교 이론은 신권(臣權)보다는 왕권을 제약하는 측면이 더 컸다. 폭군방벌론이 그것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관료가 아무리 충성스러울지라도 그 역시 언제 돌변하여 "폐하, 아니 되옵니다!"를 외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귀족이나 사대부 출신의 관료인 경우, 군주의 정책이 자기 집단의 이익을 침해한다고 판단되면 "금상(今上)에게서는 천명이 떠났다"며 반기를 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에 반해, 내시들은 달랐다. 그들은 신체의 특정 부위만 없는 게 아니라, 군주가 보기에 '더 중요한 그 무엇'도 없었다. 그것은 바로 군주의 권력을 위협할 만한 사회적 권력이었다. 대개 가난하거나 미천한 집에서 태어난 사람들인데다가 어려서부터 군주만 쳐다보면서 살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내시들에게는 군주를 위협할 만한 사회적 무기가 별로 없었다.


또 궁녀와 비교할 때에, 그들은 군주에게 사심을 가질 만한 이유가 별로 없는 사람들이었다. 궁녀들은 군주에게 성적 욕구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궁녀들의 충성심은 남녀관계가 그렇듯이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시들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없었다. 


또 왕실의 남자 구성원들과 비교할 때에도, 내시들은 군주가 신뢰할 만한 존재였다. 왕이 아닌 남자 왕족은 왕의 자리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내시들은 그럴 가능성이 없으므로 왕이 의심할 이유가 별로 없었다.  


그리고 내시들은 군주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을 최고의 가치로 배운 사람들이기 때문에, 군주가 설령 실정을 저지른다 해도 군주를 배반할 가능성이 낮았다. 군주가 귀족의 이익을 침해한다 해도 그렇고 또 설령 군주가 백성의 이익을 침해한다 해도, 내시들은 어디까지나 '왕의 남자'들일 뿐이었다.


바로 이러한 충성스러운 내시들이 있었기에 동아시아 군주들은 귀족이나 사대부와의 대결에서 힘의 균형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그들이 없었다면, 군주가 귀족이나 사대부를 억누르고 애민정책을 펴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애민정책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백성을 위하는 정책인데, 이런 정책을 펴다 보면 자연히 귀족이나 사대부의 이익을 침해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과거에 합격한 관료들이 왕의 정책을 수용할 가능성이 낮아지게 된다.


평소에는 충성스럽던 신하도 막상 자기 집단의 이익을 침해하는 정책이 시행되면 '천명이 떠났다'면서 자신의 변절을 합리화할 가능성이 있다. 이런 경우에 왕이 속마음을 터놓고 '작전'을 의논할 대상은 유능한 내시들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동아시아의 내시는 본질적으로 군주와 귀족의 대결에서 군주의 권력을 보조하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들의 존재는 기본적으로 군주의 애민정책에 긴요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군주나 백성의 입장에서는 내시를 적대시할 이유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

 
구중궁궐 같은 중국의 자금성. 환관(한국의 내시)들은 이곳에서 평생 황제만 바라보면서 살 수밖에 없었다.
ⓒ 김종성
 

"그렇지만, 내시들이 군주를 독살하고 부정부패를 일삼은 사례가 많지 않으냐?"고 질문할지 모른다. 그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내시들이 군주를 독살한 경우에도 그것은 또 다른 '차기 군주'와의 모의 하에 그렇게 한 것이지, 아무런 배경도 없이 그런 짓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그런 경우에도 그들은 기본적으로 '왕의 남자'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귀족이나 사대부 편을 든다면, 그 순간부터 그들은 존재의 의의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존재의의는 귀족이나 사대부와의 대결에서 군주를 보조하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시들이 뇌물을 받고 매관매직을 하는 등 부정부패를 일삼은 사례에 대해서도 좀 더 숙고가 필요하다. 내시가 판치고 다니는 세상은 그만큼 귀족 혹은 사대부가 기죽어 사는 세상이다. 그리고 귀족이나 사대부가 기죽은 시대는 바로 군주의 권력이 왕성한 시기다.


오스만제국의 사례에서 언급한 것처럼, 술탄의 권력이 전성기일 때에 궁정노예들이 전면에 등장했다. 이것은 자신의 수하들을 권력 전면에 내세워도 좋을 만큼 군주의 권력이 강화되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한국이나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내시들이 판치고 다닌다는 것은 그 뒤에 군주의 비호가 있으며, 또 그렇게 해도 될 만큼 군주권력이 강화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군주와 귀족(혹은 사대부)의 대결에서 군주권이 상대적으로 강화되어 군주를 견제할 사회세력이 약화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군주와 귀족이 팽팽하게 대립할 때에, 군주는 백성을 자기편으로 만들려 한다. 하지만, 귀족에 비해 압도적 우위를 점한 상태에서는 굳이 백성에게 기대려 하지 않는다. 그런 경우에 군주는 자신의 비대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불법자금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군주가 직접 나서서 부정한 돈을 거둘 수 없으니, 그 수하들인 내시가 나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시들이 부정부패를 일삼고 권력을 전횡하는 상황은, 실제로는 군주가 그 배후에 있었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아무 배경도 없는 내시들이 군주와 귀족 양편을 동시에 억압하고 그 같은 부정부패를 일삼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어느 한 쪽이 내시를 비호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귀족들은 내시를 비호하지 않으니, 군주가 그 배후에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내시들이 부정부패를 저질렀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문자 그대로 믿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귀족 관료나 사대부 관료와 달리 내시들은 본래 재산을 축적할 이유가 별로 없는 사람들이다. 인간의 욕심은 대개 성욕이나 가족 때문에 생기는 것인데, 그런 것이 없는 사람들이 불법 재물을 얻기 위해 정치적 모험을 감행했으리라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물론 내시들마다 개인차는 있었겠지만, 그들은 기본적으로 큰 욕심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군주가 그들을 기용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치적으로 볼 때에 내시의 부정부패는 분명 왕의 부정부패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에는 내시의 부정부패라고 기록되어 있다면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될 수 있을 것이다.


오스만제국의 술탄들이 궁정노예를 대재상으로 내세운 이유 중의 한 가지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신의 정치적 책임을 노예에게 떠넘기기 위해서다. 대통령제 국가인 한국에서 총리라는 '이상한 제도'를 두고 있는 데에도 유사한 이유가 작용하고 있다. 헌법학자들의 지적처럼, 총리를 '방탄용'으로 쓰려는 목적이 부분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내시들이 직접 나서서 불법 재물을 모으는 것은, 대개의 경우 군주의 비호나 지시 하에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군주가 비밀 정치자금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에 내시들이 나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경우 내시들이 주범이라고 역사에 쓰여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보스를 위해 정치자금을 수집한 보스들이 검사 앞에서 자신의 단독 범행이라고 우기는 경우와 별로 다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내시들에게 불리한 기록이 역사에 남는 것은 그들의 신체조건으로 볼 때에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역사에 긍정적으로 기술되려면, 후손들의 지위가 든든해야 한다. 군주나 귀족들에게는 그런 후손들이 있다.


하지만, 내시들에게는 양자 외에는 후손들이 없다. 훗날 자기 조상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역사 기록을 정정해달라고 요구할 후손들이 그들에게는 없는 것이다. 내시가 역사에서 부정적 이미지로 남는 데에는 이처럼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또한 내시를 비호해줄 지식인 같은 사회세력이 없기 때문에 역사에는 그들에게 불리한 기록이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어쩌면 역설적으로 그들의 청렴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해서 자기편을 만들지 않았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해서 내시들은 정말로 불쌍한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남자 구실을 못해서가 아니다. 평생 군주에게 충성하면서도 때로는 군주의 잘못까지 대신 뒤집어쓰고 그것도 모자라서 두고두고 역사에서 '나쁜 놈'으로 기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내시는 본질적으로 군주의 정치권력에 보탬이 되는 존재였는데도 오늘날에는 왕을 위협하던 존재로까지 묘사되고 있으니, 그들은 어디 가서 이 억울함을 호소해야 할까? 그들의 후손을 남길 단서는 '항아리'에 들어가고 없으니, 어느 누가 나서서 그들의 한을 풀어줄까?

-- 출처 : 오마이뉴스(www.ohmynews.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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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다할아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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