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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프로야구에서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갖기 위해 타자는 9년 동안 시즌 경기의 2/3 이상을 출장해야 하고, 투수는 규정이닝의 2/3이상을 던져야 한다. 그래서 FA계약이라는 것이 어차피 '이미 검증된 선수'인 동시에 '어쩌면 전성기가 지나고 있을지도 모를 선수'와의 계약이며, '그동안 수고한 것을 보상받고 한숨 돌리려는 선수'와 '앞으로도 최소한 그만큼은 해줄 것으로 기대하는 구단' 사이의 엇갈린 속내와 계산이 만나는 순간이다.


그러나 어차피 '관중 수'가 아닌 '포스트시즌 진출 여부'를 통해 경영자의 운명이 갈리는 한국 프로야구에서, 그것은 이미 '합리적인 계산'보다는 아무리 돈을 털어 넣어서라도, 그리고 혹 둘에 하나쯤 실패를 해서 돈만 홀랑 날리는 한이 있더라도 기꺼이 돈을 우겨넣어 잡고 보아야 하는 몇몇 대기업간의 돈싸움이 되고 만다. (그런 점에서, 액수를 곱씹을 때마다 서로 민망해질 만큼 부풀어 오른 터무니없는 몸값을 놓고 남의 탓을 해대는 프로구단들의 삿대질이야말로 적반하장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사상 최악의 FA계약으로, 나는 1999년 삼성 라이온즈와 이강철 선수 간의 계약을 꼽는다. 1억에도 못 미치는 계약이 두 건이나 있었던 'FA원년' 1999년의 일임을 감안하더라도 요즘 기준에 비추어보자면 출혈이라 할 수도 없을 헐값인 '고작 8억'(3년간)에 불과한 규모였지만, 오로지 우승을 위해 얼마든지 돈으로 승부를 낼 각오를 하고 있던 구단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애초에 FA계약에서 돈이야 중요한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이강철을 '최악'으로 꼽는 이유는, 그가 계약 직후부터 부상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간신히 돌아온 마운드에서 거둔 성적도 1승에 불과한 이른바 '먹튀'였기 때문만도 아니다. 그보다도 그가 그런 끔찍한 부진 끝에 1년 반 만에 친정팀으로 복귀하더니, 이번에는 거짓말처럼 재기해 온갖 투수 부문의 '역대 최다' 기록에 이름을 올리며 '꾸준함의 상징'으로 거듭난 선수였기 때문이다.


상대팀에 8억이라는 막대한 금전적 손실을 입혔을 뿐 아니라, 보상선수로서 '라이온즈의 정신'을 상징하던 박충식과 바꾸어짐으로써 상대팀 구단과 팬 사이를 동요시켰다. 결국에는 친정팀으로 돌아와 당당히 재기함으로써 삼성에 몇 배의 정신적 타격을 입힌 내공 깊은 복합공격을 보여주었다.


1인자는 바뀌어도 2인자는 항상 이강철


 
이강철의 투구모습
ⓒ 기아 타이거즈 홈페이지

그는 사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잘 하는 선수였고, 언제나 잘 하는 선수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의 진가를 발견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려야 했고, 아직까지도 그의 가치는 모두 알려지지도 못한 채 잊히고 있기도 하다.


그가 고교무대에서 활약하던 시절, 광주일고를 대표했던 것은 문희수, 그리고 박준태였다. 광주일고가 대통령기와 봉황대기, 황금사자기를 3연패했던 1983년, 동기생 박준태는 두 번 최우수선수로 선정되었고 한 해 선배 문희수는 최우수선수에 한 번, 우수투수에 두 번 이름을 올렸다. 치질수술을 받고부터 부쩍 자란 키와 체격 덕분에 급성장한 3학년 시절, 그 역시 황금사자기 우승을 이끌어내며 우수투수에 선정된 '스타'였지만, 그것까지 기억에 담아둔 야구팬들은 흔치 않다.


호리호리한 몸매에서 믿을 수 없는 강속구를 뿜어내며 한 해 앞의 세대를 휩쓸었던 선배 문희수는 그렇다 치더라도, 투수는 물론 내외야수와 포수까지 섭렵하며 야구가 요구하는 모든 면에서 발군의 실력을 뽐내던 동기생 '천재' 박준태를 다루기에도 미디어의 지면은 부족했던 것이다. 심지어는 이강철이 전국무대 '우수투수'로 우뚝 섰던 1984년 황금사자기에서조차 최우수선수는 박준태의 몫이었던 것이다.


동국대 시절에는 1년 선배 송진우의 부상 덕분에 잠시 에이스 역할을 맡기도 했었지만, 1989년에 들어선 프로무대에서도 그의 '2인자' 인생은 계속되었다. 그 역시 국가대표를 지내며 나름 유망주로 인정받고 있었지만, 언론의 주목은 한 해 먼저 지명을 받고도 올림픽 출전 때문에 같은 해에 해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게 된 '제 2의 선동열' 조계현이 독차지하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첫 해 7승에 머물렀던 조계현의 두 배가 넘는 15승의 깜짝 활약을 펼치며 화려한 첫 발을 내딛긴 했지만, 같은 해 태평양의 무명 고졸 신인인 같은 잠수함 투수 박정현이 무려 19승을 올리는 바람에 신인왕을 놓친 것은 '만년 2인자' 인생의 서막에 불과했다.


214.2이닝을 던지며 193개의 삼진을 잡아냈던 1991년에는 210개를 기록한 선배 선동열의 뒤로 밀려나야 했고, 기복 없이 15승 이상을 기록하며 맞이한 4년차 1992년에는 무려 18승을 올리는 기염을 토하지만, '기록의 마술사' 김영덕 감독이 연출한 대학 1년 선배 송진우의 '다승왕(19승)-구원왕(25세이브포인트)' 동시석권 마술에 휩쓸려 일생일대의 다승왕 타이틀 획득에 실패하기도 했다. 


그 뿐이랴, 그는 사상 최다인 세 번의 '1안타 완봉'경기 기록을 남김으로써 끝내 '노히트노런' 투수 명단에 이름을 남길 '삼세번'의 기회를 날린 셈이 되었으며, 1992년에는 155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유일하게 순위표 맨 윗줄에 이름을 남기기도 했지만, 이듬해인 1993년부터 공식타이틀로 인정되며 시상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결국 그가 가질 수 있었던 타이틀은 한 개도 없었던 셈이다. (1992년까지 탈삼진에 대한 시상은 하지 않았다)


거북이 이강철, 국보 투수 선동열 추월하다

 
 
광주일고 시절의 이강철
ⓒ 기아 타이거즈 홈페이지

'항상' 잘 하지만 '가장' 잘 하지는 못하는 선수. 그래서 언제나 그 자리에 있지만 굳이 찾아보지 않으면 눈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 그런 이강철이 사람들의 기억 밖에서 야금야금 쌓아올린 금자탑이 바로 10년간 기록한 두 자릿수 승리와 세 자릿수 탈삼진이다.


데뷔 첫 해인 1989년 15승으로 출발해, 컨디션과 운이 받쳐주는 해에는 18승으로 정점을 찍고 그렇지 못했던 해에는 10승으로 바닥을 다지며 이어진 것이 10년차였던 1998년까지였고, 1998년 역시 출발점과 꼭 같이 승수는 15였다.


그동안 그는 단 한 해도 거르지 않고 150이닝 이상을 던졌고, 65번의 완투와 18번의 완봉승을 곁들였다. 선동열이나 최동원처럼 이름만으로 상대 타선을 얼어붙게 만드는 카리스마는 없었지만, 해마다 3점대 초반 혹은 2점대 후반의 평균자책점으로 버텨냈고, 마지막 순간에 웃었다.


2004년 5월 13일, 그는 현대 강귀태를 상대로 1699개째 삼진을 잡아내며 선동열을 추월해 '통산 최다 탈삼진 기록 보유자'로 등장했다. 일찌감치 완주를 끝내고 일본까지 찍고 돌아와 '영원한 국보'로 자리 잡은 신화 선동열의 기록이, 느릿느릿 쉬지 않고 기어온 거북이 이강철에 의해 추월당하는 순간이었다.


그 뒤로 조금 더 기어나간 그의 기록은 1749에 멈추어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 더 빠르고 조금 더 끈질기게 달려와 '끈기'라는 면에서조차 이강철을 2인자로 밀어내버린 송진우가 그 기록을 추월하고 다시 1970까지 밀어올리고 있지만, 이강철이 잠시나마 가장 높은 곳에 머물렀던 순간이었다.


사상 첫 FA, 사상 첫 '먹튀'?


1999년, 10년 이상 활약한 선수들을 대상으로 처음 FA제도가 시행되었을 때 가장 먼저 그 혜택을 본 것이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거액인 3년간 7, 8억씩을 손에 쥐게 된 이강철, 송진우, 김동수였다. 여러모로 까다롭고 조심스러웠던 '첫 해'였기에 '10년 이상 활약한 선수들' 중에서 가장 젊은 1989년과 1990년 입단 선수들이었고, 또한 지나온 10여 년 간 한결같은 활약을 보여준 이들이었다.


사실 이강철은 1999년 시즌을 앞둔 동계훈련에서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를 다치면서 한 해를 통째로 쉬어야 했고, 그 사실은 그를 영입한 삼성 라이온즈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10년간 10승과 100탈삼진을 하한선으로 알고 살아온 선발투수, 그것도 힘보다는 제구력과 각도 큰 변화구로 승부하는 노련함을 주 무기로 하는 투수의 노하우에 의심을 품지 않았던 것이다.


 
동국대 시절의 이강철
ⓒ 기아 타이거즈 홈페이지

그러나 2000년, 1년 만에 돌아온 마운드에서 그는 고작 37이닝만을 던지며 1승 4패, 7.30이라는 낯선 성적표를 받아들고 말았고, 삼성 구단의 절망과 새로 부임한 옛 스승 김응용 감독의 배려, 그리고 타이거즈를 인수해 신장개업한 기아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며 1년 반 만인 2001년 시즌 중반에 2억원에 현금트레이드 되어 원대 복귀하는 초라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왼쪽 다리를 역동적으로 내디디며 몸을 비트는 잠수함 투수의 까다로운 투구 폼, 그것을 지탱하기에 부실해진 오른 무릎이 내내 말썽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넉넉하게 믿으며 기다려줄 고향 팀이 아니라 '한시라도 바삐 돈값을 뽑아내야 했던' 타향 팀 라이온즈, 그 곳에서 그리 독하거나 넉넉하지 못했던 그의 심성이 내내 쪼그라들고 긴장하며 스스로 무너져 내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친정팀으로 복귀하면서 모든 것은 다시 안정을 찾아갔다. 심리적 안정이 신체적 밸런스를 뒷받침했고, 이듬해인 2002년 그는 4년 만에 다시 100이닝 이상을 던지며 3.17의 훌륭한 평균자책점과 함께 5승과 17세이브를 올릴 수 있었다.


이제 선발투수에서 구원투수로 보직이 바뀌었고, 더 이상 해마다 200이닝을 던질 수도, 10승과 100개 이상의 삼진을 잡아낼 수도 없었지만 그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 낮아진 평균자책점으로 침착하게 경기를 조율했고, 상대방의 예봉을 진정시켜나갔다. 2003년에는 1.98의 평균자책점으로 6승과 9세이브, 2004년에는 2.95의 평균자책점에 6승과 7세이브였다. 그 시절 타이거즈는 이미 더 이상 '최강'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타이거즈'였고, 팬들은 그것을 이종범과 더불어 이강철을 통해 확인하곤 했다.


타이거즈 왕조의 조용한 대들보, 이강철


한희민과 박충식, 조웅천과 임창용까지 잠수함 투수들의 우연한 공통점이기도 하지만, 이강철 역시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선이 곱고 여성적인 외모에 우아한 투구동작으로 절묘한 궤적의 공을 뿌리는 선수였다. 그리고 꼭 그렇게 그는 부러질 듯 부러질 듯 휘어지며 강하게 부딪혀오는 상대를 통제했고, 그런 내공으로 90년대 '해태 타이거즈 왕조'를 떠받혔다.


그가 없었어도 해태 타이거즈는 강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왕조'라고 부를 수는 없었을 지도 모른다. 천하의 선동열도 때로는 벤치를 지켰고, 불굴의 '싸움닭' 조계현도 지쳐 숨을 고르는 시간이 있었지만, 그들의 등 뒤 팬들의 환호성도 채 닿지 않는 조용한 공간에서는 언제나 가쁜 숨을 속으로 삼키며 끈질기게 걷고 또 걸은 이강철이 추락의 하한선을 그어놓고 반격과 새 출발의 근거를 마련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함이나 기록의 높음, 빠름, 꾸준함. 그 모든 면에서 철저하게 2인자의 길을 걸어온 그였기에 돌아보고 살펴볼수록 더 놀랍고 대단한 것이 이강철의 기록이다.


신의나 진실함이나 순수함 같은 것들이 대개 그렇듯, 가치 있는 것들에 항상 높은 가격이 매겨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 프로야구 사상 가장 꾸준하고 안정적인 선수였던 이강철이 FA 계약이라는 극적인 순간에 '최악의 상품'으로 검증된 적이 있었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17년간 쉼 없이 달려 쌓아놓은 결코 작지 않은 봉우리와 그에 대한 우리들 기억의 높이를 비교해보면, 꼭 그렇지 않은가.


 
2006년 4월 12일, 광주무등경기장(두산전)에서 열린 이강철 선수의 은퇴식
ⓒ 기아 타이거즈 홈페이지

-- 출처 : 오마이뉴스(www.ohmynews.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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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다할아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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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태양이 나를 향해 눈부신 빛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빛은 수십 개로 늘어났다. 반짝이고 뜨거운 빛에 의해, 시야가 가려지고 몸이 서서히 메말라 가는 동안에도 나는 그 빛에 취해 있었다. 빛이 영원토록 내게만 비출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계속 그 빛을 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시야에서 빛이 사라졌다. 그런데 눈을 뜰 수가 없다. 내 앞에 있던 빛을 너무 오랫동안 봤기 때문일까? 결국, 눈이 멀고 내 몸은 완전히 말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다 예전에 비췄던 빛 중 유일하게 구분할 수 있었던 하얀빛이 보였다. 눈도 서서히 보였다. 옆과 뒤도 보였다. 빛을 처음 봤던 그때로 돌아간 것이다. 다시는 수많은 빛에 취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나는 한때 내 왼발로 모든 빛을 모이게 했던 고종수(29·대전 시티즌)다.


 
올 시즌 대전에서 부활한 '앙팡테리블' 고종수.
ⓒ 대전 시티즌

 

[#1. '축구천재'의 부활?] "말로 하면 뭐해요. 운동장에서 보여주면 되지"


지난 7일 오후 대전지하철 지족역 근처 한 커피전문점. 인터뷰를 위해 가게에 들어서자 막 나가려던 여성 손님이 그를 알아보고는 "고종수 잘 생겼다. 열심히 해요"라고 한마디 한다. 어색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좋은 말을 들어서 그런지 얼굴에는 미소가 번진다.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종업원의 주문 요청이 들어왔다. 그는 "달달한 것 없나요?"라고 묻더니 블랙커피를 시켰다. "설탕을 꼭 가져다 달라"는 주문과 함께.


문득 몸 관리라면 철저하다는 그의 선배 서정원이 생각났다. 서정원은 지난 7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 관련기사 바로가기)에서 '아이스 녹차'를 시켰었다. 그래서 물었다. '커피 마셔도 되냐'고. 그러자 별 걱정을 다 한다는 듯 한마디 던진다.


"TV에서 보니 하루에 커피 한 잔은 괜찮다고 하던데요.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영양학 교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고요. 커피 한 잔 정도야 별 지장 없을 것 같아요."


 
지난 7일 만난 대전의 고종수 선수.
ⓒ 이성필

그렇게 커피를 마주하고 이야기가 시작됐다.


올 시즌 고종수는 대전에 전격 입단했다. 그가 재기할 것이라 예측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공백 기간이 너무 길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서히 출전 시간이 늘어나고, 득점까지 하면서 고종수는 언론노출 빈도도 높아졌다. 게다가 그의 스승 김호(63) 감독이 대전을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는 기적을 보여주면서 그와 대전에 대한 축구팬들과 언론의 관심은 폭발적이었다.


"인터뷰를 자제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쉽지가 않더라고요. 구단에서도 그런 점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하는 것 같았고요. 그래도 팬들이 궁금한 점을 풀어줘야 한다고 생각해서 여러 인터뷰에 응했어요."


그와 인터뷰를 끝낸 뒤 대전의 연습경기가 열린 월드컵 보조구장에서 만난 구단 직원은 여전히 밀려들어 오는 인터뷰 요청을 조절하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에이전트인 AI스포츠 곽희대 대표 역시 마찬가지였다. 같은 질문에 같은 말을 반복해야 하는 어려움 때문인지 그는 더 이상 언론의 인터뷰 요청을 응하기 힘들다며 다음과 같은 말로 정리했다.


"(축구를) 잘 하지도 못하는데 말로 하면 뭐해요. 운동장에서 보여주면 되지. 운동선수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하면 될 것 같아요."


[#2. 수원과 그랑블루]  "겉으론 욕해도 마음 속으론 응원하지 않을까요?"


 
대전에서 다시 만난 김호 감독(왼쪽)과 고종수(오른쪽).
ⓒ 대전 시티즌

K리그에 첫 발을 내딛게 해준 수원 삼성 블루윙즈은 그와 뗄 수 없는 사이다. 1996년 만 열여덟의 어린 나이에 창단 멤버로 두 번의 정규리그 우승과 아시아 클럽 정상을 같이 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대표로 인연을 맺었던 차범근 감독과 2004년에도 만났다. 수원 서포터 '그랑블루' 역시 그와 같이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솔직히 수원 팬들은 늘 마음 구석에 자리하고 있어요. 종합운동장(수원월드컵경기장이 생기기 전 수원 홈 구장) 시절부터 같이 커왔잖아요. 지난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 때 반대쪽에서 그들(그랑블루)을 보게 됐는데 여전히 대단하고 멋있더군요."


그랬다. 지난 10월 14일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대전은 수원을 만나 1-0의 승리를 거뒀다. 경기 후 김호 감독과 고종수는 수원 팬들이 자리한 남쪽 관중석 앞으로 이동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이들에게 박수를 쳐주는 팬들도 있었고 야유를 보내는 팬들도 있었다.


"몇몇 팬들은 겉으로는 저한테 욕하고 그러시는 것 같던데 마음 속으로는 응원해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다고 제가 잘 보일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이제는 대전 팬들이 열렬히 응원해 주잖아요."


어느새 대전의 '자줏빛 전사'가 다 됐다. 여러 인터뷰에서도 대전 팬들의 열정을 높이 치켜세웠다. 대신 그는 한 가지 바람을 얘기했다.


"그랑블루 같은 서포터가 팀마다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면 선수들도 경기할 맛이 날 텐데요. 한쪽은 온통 빨갛고 다른 쪽은 새파랗고,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요."


2004년 J리그(교토 퍼플상가)에서 돌아와 FC서울과 입단 계약 직전까지 갔던 고종수는 수원으로 다시 돌아왔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팬들의 성원과 그리움이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팀 무단이탈과 음주 등으로 물의를 일으켰고 차범근 감독과의 사이도 벌어졌다는 소문까지 터져 나왔다. 결국, 구단은 그를 임의탈퇴 시켰다. 이때부터 그의 방황은 시작됐다.


"그때는 제가 정신이 나갔었나 봐요. 힘든 시기였고 모든 게 틀어진 것 같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전적으로 다 제 잘못이죠. 생각이 너무 짧았어요. 차 감독님과 안 맞는 것은 아니었어요. 단지 감독님의 선진적인 축구 사상을 제가 부족해서 못 따라간 것뿐이죠."


[#3. 지독한 부상] "신이 있다면 내가 뭘 잘못 했는지 묻고 싶어요"


 
고종수 선수의 미니홈피.
ⓒ 인터넷 화면 캡처

어느새 서른 문턱까지 다다른 고종수, 그의 개인 홈페이지에는 여러 가지 문구가 새겨져 있다. 그중에도 '사자는 아무리 배고파도 풀은 뜯지 않는다'는 상당히 인상적인 문구다. 자신을 사자에 이입시킨 것 같은 느낌의 문구에 대해 그는 "비굴하게 살지 않는 게 자신의 신조"라고 강조했다.


또 다른 문구도 있다. '실패라는 상처 위에 인내라는 약을 발라 노력이란 붕대를 감는다면 성공이라는 흉터가 남는다'라는 것이다. 지인이 어느 날 힘내라며 보낸 문구를 보고 난 뒤 '정말 내 인생 같다'는 느낌이 들어 늘 새겨놓고 있다고 한다.


"인생이란 게 그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잘할 때 연락하던 주변 사람들이 헤매고 있으니 알아서 연락을 안 하더군요. 요즘에서야 가끔 연락이 오는데 그러더라고요. '연락하려니 마음이 안 좋아서 그랬다'고들 하던데 뭐 괜찮아요. 이제 '축구천재'가 아닌 묵묵히 운동해서 기억에 남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2001년 8월, 수원 시절의 고종수는 전남 드래곤즈와의 경기에서 오른 무릎 전방십자인대 파열이라는 큰 부상을 겪었다. 물론 그 이후로 다시 경기에 나서 재기에 힘썼지만 부상이 다시 재발하는 불운을 겪었다.


그는 무릎의 수술 자국을 보여줬다. 손으로 만지니 무릎 아래쪽이 움푹 들어갔다. 수술만 여섯 번을 했다는 그는 그곳을 가리키며 '인대가 없다'고 표현했다. 수 없이 재발한 부상의 생채기였던 것이다.


"하루에 운동을 네 번씩 했어요. 매일 야채만 먹으면서 죽어라 재활에 매달렸어요. 저 재활치료사 해도 될 걸요. 그런데 또 아프고 그러니깐 정말 왜 나한테 이런 시련이 오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종교를 가지지 않았지만 만약 신이 있다면 내가 뭘 잘못 했는지 묻고 싶어요."


[#4. 휴식, 혹은 외도] "무릎팍 도사에 나가면 할 말 많을 걸요"


드라마 같은 시즌이 종료된 지금 그는 팀의 마무리 훈련을 끝낸 뒤 병원을 오가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오른쪽 골반 부위가 조금 아프다고 한다. 이에 대해 김호 감독은 '피로가 쌓여서 오는 증세'라며 휴식을 확실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귀곡 산장' 같은 구단숙소에서 '24시간 뉴스 채널'과 '몇몇 드라마'를 보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고 한다. 낙후된 대전의 숙소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것밖에 없을 것이다. 혹은 근처 군부대의 나팔소리와 군가로 하루의 시작과 마무리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무료할 법도 하다. 과거 잘 나가던 시절 그는 연예 프로그램 종종 등장했다. 최근 인터넷에는 그가 출연했던 시트콤, 뮤직 비디오 동영상이 돌아다닌다. 혹시 방송국에서 불러주면 다시 나갈 생각은 있을까?


"일 년 내내 운동하고 나면 지쳐요. 공부하는 사람이 매일 공부만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다른 경험을 해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에요."


이쯤 되면 '고종수 아직도 정신 못 차렸다'는 비판의 소리가 들릴 만하다. '노는 기질'을 버리지 못했느냐며 반성하라는 이야기도 나올 것이다.


"물론 운동에 지장을 주면 안 되죠. 시즌 종료 후 휴식기간 동안에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운동장에서 거친 부분만 보여주다가 새로운 것을 보여주는 것도 일종의 팬 서비스 아닐까요? 팬들이 그런 부분을 알아주면 좋겠어요."


최근 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즈의 타자 양준혁(38)은, MBC 예능 프로그램인 <황금어장>의 '무릎팍 도사'에 출연하기로 했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뭐든지 팬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선수들이 먼저 다가가야 한다. 훈련에 지장을 받지 않는다면 비시즌 때 개그 프로그램에도 출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양준혁의 발언은 고종수의 생각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넌지시 그에게 물었다. 무릎팍 도사에 출연해 '자신의 고민 상담'과 동시에 '대전'과 '축구'를 홍보해 볼 생각은 없느냐고.


"만약 무릎팍 도사에 나간다면 할 말 많을 거예요. 제 인생이 완전 인간극장 따로 없잖아요. 영화로 찍어도 될 걸요."


 
지난 7일 대전에서 만난 고종수 선수.
ⓒ 이성필

 

[#5. 인생의 동반자] "팬들과 통닭에 생맥주 한잔 했으면..."


그는 요즘 부모님의 건강이 걱정이다. 한 분이라도 괜찮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않아 더욱 그렇다.


"수원과의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 때 관중석에서 보셨대요. 몸이 아파서 힘드신데도 오셨더라고요. 이기니깐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제가 재기하고 우리팀(대전)이 6강까지 오르는 모습을 보며 부모님께서 용기를 많이 얻으신 것 같아요."


부모님과 더불어 그에게는 감사하고 함께 가야 할 대상이 있다. 바로 자신을 묵묵히 응원하던 팬들이다. 수원에서 전남으로 다시 대전에 오기까지 이들은 한결같이 그의 부활을 기원했다. 경기장에는 그의 출전 여부와 상관없이 '왼발로 통한다! 고종수' 혹은 '고종수. 그는 프로이기에 아름답다'는 펼침막이 늘 걸려 있었다.


다른 종목보다 팀에 대한 팬들의 충성도가 강한 대한민국 풍토에서 선수가 옮길 때마다 응원하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그의 별명 '앙팡테리블'로 명명된 팬클럽에 대한 고마움은 상당하다.


"김호 감독님은 늘 팬에 대해서 소중히 여겨야 하는 마음을 심어주셨어요. 팬들을 만날 때도 슬리퍼를 신고 나가서는 안 된다는 등 세세하게 지적해주셨죠. 예전에 감독님이 좋아하는 팬들과 관광버스 빌려서 여행도 가고 그러던데 저도 나중에 그렇게 해보고 싶어요."


역시 스승의 영향이 컸다. 최근 그는 팬 페이지에 짧은 글을 남겼다. 시즌 종료하면 '회식'하자고….


"예전에는 휴가 때 만나서 신당동에 떡볶이를 먹으러 가고는 했어요. 그땐 대부분 학생이었는데 이젠 다들 성장했잖아요. 결혼도 하고, 돈도 벌고. 이제는 통닭에 가볍게 맥주 한잔하며 이야기했으면 좋겠어요. 어른이니까요."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대전의 연습 시간과 맞물리게 됐다. 마지막으로 만약이란 가정 하에 국가대표에 부름 받을 몸이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여전히 공격형 미드필더인 그의 감각적인 패스를 그리워하는 팬들이 많기 때문이다.


"국가대표에 큰 미련은 없어요. 이미 월드컵에 한 번 뛰어 봤잖아요. 지금은 그런 생각 할 여유가 없어요. 부르면 가는 거고 아니면 마는 거죠. 그래도 나라에서 부르면 당연히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개인에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시원시원한 대답, 그러면서도 뭔가 생각이 많아진 그의 모습이다. 새로운 전환점에 서 있는 고종수가 어떤 길을 선택해 걸어갈지 궁금해진다.

-- 출처 : 오마이뉴스(www.ohmynews.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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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다할아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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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퍼거슨 감독의 맨유 감독 취임 21주년을 맞이해서 맨체스터이브닝뉴스에서
퍼거슨 감독의 역대 영입선수 21명을 순위별로 선정해서 발표했습니다.



21위는 87년부터 98년까지 맨유 선수로 있었던 브라이언 맥클레어가 선정됐습니다.
당시 85만 파운드로 영입했으며, 그후 맨유에 12년 간 있으면서 스트라이커던 혹은
미드필드던, 포지션에 가리지 않고 묵묵히 뛰었으며, 나중에 코치생활도 맨유에서 하면서
팀에 충성해 온 선수라고 추켜세우고 있습니다.




20위는 작년 시즌 후반기에 임대로 영입한 헨릭 라르손을 선정했습니다.
비록 임대로 와서 13경기 밖에 뛰진 않았지만 팀에 끼친 영향을 결코 괴소평가 되어선
안될 선수라고 합니다.
만약 그가 작년시즌 계속 뛰었다면 맨유의 작년시즌의 챔피언스리그에 영향을 끼쳤을
거라고 주장합니다.



19위는 현재 맨유의 중앙수비수인 비디치 선수를 꼽았습니다.
영입 초기에는 불안했지만 나중에 그는 맨유 수비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면서
과거 맨유 주장인 스티브 브루스를 연상케 할만큼 용기와 골본능이 있다고 합니다.




18위는 현재 맨유 수문장인 반데사르 골키퍼를 꼽았습니다.
과거 피터 슈마이겔 이후 그에 가장 필적할만한 선수라고 평가합니다.




17위는 스트라이커인 드와이트 요크가 선정됐습니다.
지금도 맨유 팬들은 그가 얼마나 뛰어난 선수였는지를 모른다고 하면서 맨유가
트레블을 달성할 때에 뛰어난 선수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16위는 현재 수비수인 리오퍼디난드를 선정했습니다.
맨유가 자랑하는 클래스 수비수이이며 맨유 선수로서 시즌 데뷔할 때 리그우승의
수훈갑이었다고 합니다.




15위는 아직도 선수생활을 하는 테디 쉐링엄을 꼽았습니다.
에릭칸토나가 31살의 나이로 은퇴를 선언했을 때, 동갑내기인 쉐링엄이 그의 대타로
맨유에 입단했고, 4년동안 맨유의 트레블 달성을 포함한 리그우승에 기여한
선수로 꼽힌다고 합니다.



14위는 앤디콜 선수를 선정했습니다.
당시 글랜호들 대표팀감독을 포함한 세간에 끊임없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 왔던 선수지만
그는 맨유선수로서 275 경기에 나와서 121골을 넣으면서 5번의 리그우승, 2번의 FA컵
그리고 챔피언스 리그 우승의 공로자라고 합니다.




13위는 맨유 중앙수비수였던 얍스탐 선수를 꼽았습니다.
그의 파워풀한 수비력으로 맨유 트레블 달성의 일등공신으로 꼽았습니다.
만약 맨유가 그를 서둘러 팔지 않고 팀에 잔류했다면 아마도 맨유는 챔피언스리그를
4연패까지도 가능하게 할수 있었다고 평가합니다.



12위는 웨인루니를 곱았습니다.
폴게스코인 이후 활력이 넘치는 재능있는 선수가 없었다가, 웨인루니가 출현하면서
맨유는 그를 잡았고, 맨유 데뷔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여 2700만파운드의
엄청난 몸값을 지닌 가치를 증명한 선수라고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맨유에서 그는 더욱 지대한 공헌을 할 선수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11위는 89년부터 98년까지 맨유에 있었던 수비수인 게리 펠리스트가 선정됐습니다.
89년 당시 230만 파운드로 미들브스로에서 영입했는데 당시는 잉글랜드리그의
역대 최고 이적료라고 합니다.
당시 맨유 데뷔 전에서 실수로 2골을 헌납하면서 최악의 데뷔전을 치루었지만
그후 다시는 그런 실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10위는 현재 맨유 최고의 에이스로 거듭난 크리스티아노 호나우두가 뽑혔습니다.
베컴의 후계자로 영입된 그는 볼튼 데뷔전에서 현란한 기술로 팬들을 매료시켰고
지금은 세계 최고 선수 가운데 하나로 성장했다고 합니다.




9위는 현재 버밍햄의 감독이자 당시 맨유 주장이었던 수비수 스티브 브루스가
선정됐습니다.
당시 수비의 핵심인 테리부처가 떠나면서 그 대안으로 브루스를 영입했고,
그후 퍼거슨 감독은 그가 있을 동안 다시는 테리부처를 그리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8위는 현재 블랙번 감독인 마크 휴즈를 선정했습니다.
원래 그는 퍼거슨 감독이 오기 전에 바르셀로나로 옮겼지만 나중에 퍼거슨 감독은
88년에 그를 다시 데려오는데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팀에 있을 동안 휼륭하면서도 활력이 넘치는 골을 넣었는데, 특히 90년도 FA컵의
결승전에서 크리스탈팰리스를 상대로 2골, 컵위너스컵 때에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스트라이커로서 자기 역할을 다한 선수였다고 합니다.



7위는 작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올레 군나르 솔샤르를 곱았습니다.
경기 도중에 벤치에서 일어나 놀라운 활약으로 골을 넣은 슈퍼서브 이상의 선수였다고
하면서 특히 99-2000시즌에 챔피언스리그의 결승 전에 승리의 최고 주역이라고 합니다.



6위는 작년 시즌 직전에 레알마드리드로 옮긴 반니스텔루이가 선정됐습니다.
치명적인 무릎 부상을 극복하고 맨유에 있으면서 217경기에서 150골을 넣은
골머신이라고 칭찬합니다.
그런 그의 기록은 과거 맨유 전설인 바비찰튼과 데니스로에 비견된다고 평가합니다.




5위는 1990년 부터 2000년까지 맨유에 있었던 데니스 어윈을 선정했습니다.
맨유 역대 최고의 좌측윙백 중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으며 거의 실수가 없는 선수였다고
합니다.
퍼거슨 감독 밑에서 그는 기복이 없이 언제나 똑같은 실력을 발휘했다고 합니다.




4위는 이제 맨유의 살아있는 전설이 된 라이언 긱스가 선정되었습니다.
데이빗베컴, 폴스콜스, 니키버트, 네빌 형제를 포함한 맨유 유스시스템이 길러낸
걸작품이라고 합니다.
맨유 데뷔 이후 15년간 줄곳 좌측에서 끊임없는 최고의 플레이를 선사해 왔으며
앞으로도 바비찰튼이 보유한 759 경기 출전기록를 깰 선수라고 합니다.



3위는 현재 선더랜드 감독인 로이킨이 선정됐습니다.
93년에 브라이언 롭슨의 후계자로 영입했으며 중앙미드필드로서 90년대를 통해
맨유의 심장으로 자리잡으면서 맨유의 영광을 펼치 선수라고 합니다.




2위는 91년부터 99년까지 맨유의 수문장으로 활약한 피터 슈마이겔 골키퍼가
선정됐습니다
맨유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이면서 맨유의 가장 위대한 선수라고 평가합니다.
당시 브론드비에서 55만 파운드에 영입했는데, 퍼거슨 감독은 이런 이적거래를
가리켜서 세기의 바겐세일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퍼거슨 감독이 영입한 역대 최고 선수 1위는 에릭 칸토나가 선정됐습니다.
과연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맨유가 이 위대한 영광이 있었겠느냐고 반문합니다.
86년에 퍼거슨 감독이 팀을 맡으면서 리빌딩의 일환으로 영입한 그는 그후 부터
수많은 맨유의 영광을 이루어 낸 선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활약은 맨유의 골든제네레이션인 긱스,베컴, 스콜스 등에도
영향력을 미쳤고 이제 맨유의 전설이 된 선수라고 합니다.


글쎄요..
아마도 많은 맨유 팬들이 베컴?은 왜 없지라고 할수도 있을 것 같네요.
그리고 맨유 팬들이 평가는 역대 최고의 미드필드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폴잉스도
안 보이네요.
그리고 지금도 뛰는 폴스콜스도 낄수 있을 것 같고, 묵묵히 맨유의 우측 수비를
담당하면서 기복없는 플레이를 펼치는 주장인 게리네빌도 안 보이네요.
아마도 이것은 어디까지나 맨체스터이브닝에서 주관적으로 평가한 기록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참고로 퍼거슨 감독의 최악의 영입도 선정했습니다.
이태리 출신의 골키퍼인 마시모 타이비는 99년 베네치아에서 영입해서 2000년까지
뛰었는데, 아마도 맨유 역사상 가장 최악의 골피커일 거라고 합니다.
그리고 2003-5년까지 맨유에 있었던 젬바젬바 선수는 잠재적으로 로이킨의
후계자라고 평가했지만 결국 실패했다고 합니다.
또한 2003-5년까지 뛰었던 클레베르손도 바르셀로나의 호나딩요 영입에 실패하면서
대신 영입하면서 퍼거슨 감독도 호나딩요에 견줄 선수라고 평가했지만 결국
공통점은 국적이 같다는 사실 하나 뿐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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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다할아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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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대전과 성남의 삼성하우젠 K리그 2007 20라운드 경기는 홈팬들에게 두고두고 아쉬울만한 경기였다. 대전은 우승후보로 꼽히는 성남을 상대로 잘 싸우고도 석연치 않은 판정 논란으로 결승골을 내주며 무너졌다. 결승골 이전까지 사실상 대전이 주도권을 잡아나가던 분위기였기에 아쉬움은 클 수밖에 없었다.

자칫 판정 논란 속에 모두 묻힐 뻔했지만, 정작 이날 대전은 불운한 결과 속에서도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다는데 충분히 위안을 삼을만했다. 바로 오랫동안 기다려온 '풍운아' 고종수(29)의 부활을 바로 눈앞에서 확인했기 때문이다.


'앙팡테리블', 대전에서 새로운 축구인생 시작


 
▲ 대전 시티즌의 고종수.
ⓒ 대전 시티즌
 

한때 '앙팡테리블(프랑스어로 무서운 아이)'이라는 닉네임으로 불리던 한 소년이 있었다. 1996년 수원 삼성의 창단 멤버로 처음 이름을 알린 이 작은 체구의 고졸 신인은 일약 팀을 K리그 정상으로 끌어올리며 프로축구계에 '무서운 아이' 신드롬을 일으켰다.


같은 해 비쇼베츠 감독이 이끌던 올림픽대표팀에 최연소로 발탁되어 곧장 주전 플레이메이커 자리를 꿰찼으며, 차범근 성인 대표팀 감독의 눈에 들어 98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지역예선에 합류했으며, 본선에서도 멕시코, 네덜란드, 벨기에와의 조별예선 3경기에 모두 출장하는 등, 엘리트 코스를 거쳤다.


K리그의 르네상스기로 꼽히던 90년대 후반에서 2001년까지는 그야말로 고종수의 전성시대이기도 했다. 당시 포항의 이동국, 부산의 안정환과 더불어 한국축구 '신세대 트로이카'로 꼽히던 3인방은 출중한 실력과 개성, 뛰어난 스타성을 겸비하며 K리그를 대표하는 스타로 자리매김했었다.


그로부터 어느덧 6년의 세월이 흘러 2007년, 고종수가 돌아왔다. 무릎부상으로 2002 월드컵 엔트리에서 탈락한 이후, J리그에서의 실패와 오랜 재활로 인한 후유증, 사생활을 둘러싼 논란과 잦은 돌출행동으로 그는 '문제아'라는 멍에를 쓰며 잊혀졌다. 팬들의 기억 속에 고종수는 더 이상 '앙팡테리블'이 아닌, 어른이 되기를 거부한 피터팬으로 남았다.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무적 선수 신분으로 방황한 지 일 년 반, 고종수는 어느덧 우리 나이로 서른의 문턱에 접어들며 이제는 성숙한 남자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자신을 오늘날 스타로 키워준 옛 은사의 품안에서, 그때 그 소년은 다시 어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김호 감독이 대전의 지휘봉을 잡은 후반기, 8월 1일 부산과의 컵대회 16강전을 통해 복귀 신고식을 가진 고종수는 팀 내에서 꾸준히 '조커'로 출전기회를 잡아가고 있다. 정규리그에서는 지난 12일 포항 전을 시작으로 최근 팀이 소화한 6경기 중 4경기에서 교체멤버로 출전했다.


한 박자 빠른 패스와 넓은 시야, '여전하네'


2일 경기에서 김두현의 선제 골로 성남에 0-1로 끌려가던 후반 5분, 김호 대전 감독은 고종수를 예상보다 빨리 투입했다. 추가시간을 포함하여 이날 약 43분 출장은 고종수가 올 시즌 가장 많은 시간을 소화한 경기였다.


'양뿐 아니라 질'에서도 고종수의 활약은 근래 들어 가장 돋보였다. 투입되자마자 고종수는 후반 10분 페널티 에이리어 오른쪽에서 기습적인 중거리슈팅을 날리며 가벼운 몸놀림을 보여줬다. 경기의 흐름을 파악하고 상대의 타이밍을 빼앗는 고종수 특유의 템포축구가 돋보이는 장면이었다.


체력적으로 아직 부족한 만큼 1대 1 상황에서 날카로운 돌파를 보여준다거나 빈 공간을 파고드는 것처럼 운동량을 필요로 하는 플레이는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나 플레이메이커로서 한 박자 빠른 패스와 넓은 시야를 통해 동료들에게 수차례 공격의 활로를 만들어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 이날 동점골을 넣은 데닐손과 함께 보여준 콤비플레이가 인상적이었다. 개인기와 돌파력이 좋은 데닐손이 활발한 움직임으로 공간을 창출하면 고종수가 한 박자 빠른 패스로 지원하거나 다른 동료들에게 찬스를 만들어주는 식의 플레이가 이날 계속됐다. 후반 대전의 공격은 대부분 고종수-데닐손을 중심으로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종수는 이날 수비에도 의욕을 보였다. 전성기 시절의 고종수는 수비 부담이 많은 역할이 아니었고, 스스로도 수비 가담에 그리 적극적인 선수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날 고종수는 팀 사정상 민첩하지는 못했지만 하프라인을 몇 차례 왕복하며 수비를 지원하고 몸을 날려 공중 볼을 따내는 등 강한 투지를 선보였다. 재기에 대한 선수의 집념을 읽을 수 있었던 대목이다.


아쉽게도 고종수에게 복귀 이후 처음으로 승리의 주역이 될 수도 있었던 이날 경기는, 후반 40분 터진 김동현의 결승골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모두가 인정 할 수 있는 실점이 아니라, 성남의 프리킥이 판정 논란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안타까울 일이다.


고종수는 경기가 끝난 후 굳은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빠져나갔다. K리그 복귀이후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준 하루였음에도 운이 따르지 않았다. 경기의 스포트라이트는 이날 스스로 승부를 결정지어버린(?) 심판의 멋쩍은 모습과, 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에게 달려든 어느 대전 구단 임직원과의 몸싸움, 그 위로 날아오르던 관중들의 '분노의 물병(?)' 속에 가려졌다.


만일 이날 대전이 승리하거나 혹은 비기기만 했더라도 오늘의 주역은 고종수가 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팬들은 고종수를 결코 잊지 않았다. 이날 고종수가 보여준 화려한 부활과 김호가 이끄는 대전의 가능성에 대전 팬들은 환호하며 따뜻한 격려의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오늘 졌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고종수에게도, 대전에게도, 재기는 이제 시작일 뿐이니까.

-- 출처 : 오마이뉴스(www.ohmynews.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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