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대전과 성남의 삼성하우젠 K리그 2007 20라운드 경기는 홈팬들에게 두고두고 아쉬울만한 경기였다. 대전은 우승후보로 꼽히는 성남을 상대로 잘 싸우고도 석연치 않은 판정 논란으로 결승골을 내주며 무너졌다. 결승골 이전까지 사실상 대전이 주도권을 잡아나가던 분위기였기에 아쉬움은 클 수밖에 없었다.

자칫 판정 논란 속에 모두 묻힐 뻔했지만, 정작 이날 대전은 불운한 결과 속에서도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다는데 충분히 위안을 삼을만했다. 바로 오랫동안 기다려온 '풍운아' 고종수(29)의 부활을 바로 눈앞에서 확인했기 때문이다.


'앙팡테리블', 대전에서 새로운 축구인생 시작


 
▲ 대전 시티즌의 고종수.
ⓒ 대전 시티즌
 

한때 '앙팡테리블(프랑스어로 무서운 아이)'이라는 닉네임으로 불리던 한 소년이 있었다. 1996년 수원 삼성의 창단 멤버로 처음 이름을 알린 이 작은 체구의 고졸 신인은 일약 팀을 K리그 정상으로 끌어올리며 프로축구계에 '무서운 아이' 신드롬을 일으켰다.


같은 해 비쇼베츠 감독이 이끌던 올림픽대표팀에 최연소로 발탁되어 곧장 주전 플레이메이커 자리를 꿰찼으며, 차범근 성인 대표팀 감독의 눈에 들어 98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지역예선에 합류했으며, 본선에서도 멕시코, 네덜란드, 벨기에와의 조별예선 3경기에 모두 출장하는 등, 엘리트 코스를 거쳤다.


K리그의 르네상스기로 꼽히던 90년대 후반에서 2001년까지는 그야말로 고종수의 전성시대이기도 했다. 당시 포항의 이동국, 부산의 안정환과 더불어 한국축구 '신세대 트로이카'로 꼽히던 3인방은 출중한 실력과 개성, 뛰어난 스타성을 겸비하며 K리그를 대표하는 스타로 자리매김했었다.


그로부터 어느덧 6년의 세월이 흘러 2007년, 고종수가 돌아왔다. 무릎부상으로 2002 월드컵 엔트리에서 탈락한 이후, J리그에서의 실패와 오랜 재활로 인한 후유증, 사생활을 둘러싼 논란과 잦은 돌출행동으로 그는 '문제아'라는 멍에를 쓰며 잊혀졌다. 팬들의 기억 속에 고종수는 더 이상 '앙팡테리블'이 아닌, 어른이 되기를 거부한 피터팬으로 남았다.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무적 선수 신분으로 방황한 지 일 년 반, 고종수는 어느덧 우리 나이로 서른의 문턱에 접어들며 이제는 성숙한 남자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자신을 오늘날 스타로 키워준 옛 은사의 품안에서, 그때 그 소년은 다시 어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김호 감독이 대전의 지휘봉을 잡은 후반기, 8월 1일 부산과의 컵대회 16강전을 통해 복귀 신고식을 가진 고종수는 팀 내에서 꾸준히 '조커'로 출전기회를 잡아가고 있다. 정규리그에서는 지난 12일 포항 전을 시작으로 최근 팀이 소화한 6경기 중 4경기에서 교체멤버로 출전했다.


한 박자 빠른 패스와 넓은 시야, '여전하네'


2일 경기에서 김두현의 선제 골로 성남에 0-1로 끌려가던 후반 5분, 김호 대전 감독은 고종수를 예상보다 빨리 투입했다. 추가시간을 포함하여 이날 약 43분 출장은 고종수가 올 시즌 가장 많은 시간을 소화한 경기였다.


'양뿐 아니라 질'에서도 고종수의 활약은 근래 들어 가장 돋보였다. 투입되자마자 고종수는 후반 10분 페널티 에이리어 오른쪽에서 기습적인 중거리슈팅을 날리며 가벼운 몸놀림을 보여줬다. 경기의 흐름을 파악하고 상대의 타이밍을 빼앗는 고종수 특유의 템포축구가 돋보이는 장면이었다.


체력적으로 아직 부족한 만큼 1대 1 상황에서 날카로운 돌파를 보여준다거나 빈 공간을 파고드는 것처럼 운동량을 필요로 하는 플레이는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나 플레이메이커로서 한 박자 빠른 패스와 넓은 시야를 통해 동료들에게 수차례 공격의 활로를 만들어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 이날 동점골을 넣은 데닐손과 함께 보여준 콤비플레이가 인상적이었다. 개인기와 돌파력이 좋은 데닐손이 활발한 움직임으로 공간을 창출하면 고종수가 한 박자 빠른 패스로 지원하거나 다른 동료들에게 찬스를 만들어주는 식의 플레이가 이날 계속됐다. 후반 대전의 공격은 대부분 고종수-데닐손을 중심으로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종수는 이날 수비에도 의욕을 보였다. 전성기 시절의 고종수는 수비 부담이 많은 역할이 아니었고, 스스로도 수비 가담에 그리 적극적인 선수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날 고종수는 팀 사정상 민첩하지는 못했지만 하프라인을 몇 차례 왕복하며 수비를 지원하고 몸을 날려 공중 볼을 따내는 등 강한 투지를 선보였다. 재기에 대한 선수의 집념을 읽을 수 있었던 대목이다.


아쉽게도 고종수에게 복귀 이후 처음으로 승리의 주역이 될 수도 있었던 이날 경기는, 후반 40분 터진 김동현의 결승골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모두가 인정 할 수 있는 실점이 아니라, 성남의 프리킥이 판정 논란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안타까울 일이다.


고종수는 경기가 끝난 후 굳은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빠져나갔다. K리그 복귀이후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준 하루였음에도 운이 따르지 않았다. 경기의 스포트라이트는 이날 스스로 승부를 결정지어버린(?) 심판의 멋쩍은 모습과, 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에게 달려든 어느 대전 구단 임직원과의 몸싸움, 그 위로 날아오르던 관중들의 '분노의 물병(?)' 속에 가려졌다.


만일 이날 대전이 승리하거나 혹은 비기기만 했더라도 오늘의 주역은 고종수가 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팬들은 고종수를 결코 잊지 않았다. 이날 고종수가 보여준 화려한 부활과 김호가 이끄는 대전의 가능성에 대전 팬들은 환호하며 따뜻한 격려의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오늘 졌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고종수에게도, 대전에게도, 재기는 이제 시작일 뿐이니까.

-- 출처 : 오마이뉴스(www.ohmynews.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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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다할아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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