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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시작된 SBS 드라마 <왕과 나>.
ⓒ 김종성
 

최근 시작된 SBS 드라마 <왕과 나>에 나타난 내시는 독자적 이해관계를 구축하면서 왕권을 위협하는 이미지를 띠고 있다. 중국에서는 내시 대신 환관이라는 표현이 주로 사용되고 있다.


1, 2회에서는 세조에 이어 새로 즉위한 예종이 집권 초기부터 내시부 개혁에 착수하자, 이에 맞서 판내시부사 조치겸(전광렬 분)이 왕권에 맞서 활로를 모색하는 장면이 방영되었다. 물론 드라마에서 말이다.


<왕과 나>에 전형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은 내시를 '궁중에서 왕권을 위협한 존재'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중국역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환관의 폐해'니 '환관의 농간'이니 하는 표현이 그런 인식을 더욱 더 부채질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내시제도가 본래 어떤 정치적 기획 하에서 출발한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내시가 왕권을 위협했다는 일부의 통념이 그리 근거가 없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사실, 내시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인식은 다분히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형성된 측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시제도가 왕권과 관련하여 어떤 기능을 갖고 있었는가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유용한 사례가 있다. 그것은 바로 오스만제국(1299~1922년)의 궁정노예제도다.


2001년에 이하라 히로시가 짓고 벤세이출판사(일본)가 펴낸 <지식인의 제상>에 실려 있는 스즈키 다다시(도쿄대 동양문화연구소) 교수의 '오스만제국에 있어서 지(知) 및 권력의 담당자와 정치과정의 변용'이라는 논문에는 과거 오스만제국의 왕들이 궁정노예를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오스만 궁정에 있던 노예신분의 남자들은 동아시아의 내시와 '신분적’으로 다를 게 별로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오스만제국의 궁정노예들이 거세를 했는지에 관해서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오스만제국의 궁정노예들이 내시와 같았다는 말은 '신체적'으로 그렇다는 게 아니라, 궁궐에 사는 왕의 남자 노예라는 '신분적' 조건이 같다는 의미다. 


술탄(오스만제국 군주) 전제정치가 확립된 15세기 후반부터 오스만제국의 통치구조에는 특이한 현상이 나타났다. 군주 전제정치가 확립되었으니 술탄이 전면에 나섰을 법한데, 도리어 술탄은 뒤로 물러나고 엉뚱한 제3자가 권력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그 제3자라는 것은 술탄의 절대적 대리인으로서의 영향력을 가진 대재상(국무총리)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대재상들의 대부분이 귀족이나 관료 출신이 아닌 궁정노예 출신이었다는 점이다. 한국이나 중국식으로 표현하면, 내시 혹은 환관들이 국무총리를 맡은 셈이다.


오스만제국의 술탄들이 궁정노예에게 대재상을 맡긴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이는 그만큼 술탄의 권력이 귀족의 권력을 능가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이러한 제도를 통해 술탄들이 자신의 정치적 책임을 절대적 대리인인 대재상에게 떠넘기려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아무런 권력기반이 없는 궁정노예에게 대재상직을 맡김으로써 대재상의 권력이 강화되지 못하도록 하는 동시에, 귀족들의 권력도 견제하고 술탄 자신의 권력도 강화시킬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처럼 전제정치가 확립된 15세기 후반부터 오스만제국의 술탄들은 자신의 측근인 궁정노예들을 권력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귀족들을 견제하는 한편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


 
창경궁 명정전에 있는 보좌. 내시는 보좌를 위협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를 보좌하는 존재였다.
ⓒ 김종성
 

한국과 중국의 내시제도도 유사한 취지를 갖고 있었다.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취지에서 남자 노예들을 궁궐에 두었던 것이다.


전통시대에 군주는 기본적으로 백성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군주는 귀족의 압제로부터 백성을 보호하는 '호민관'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군주가 귀족들과 한패가 되어 백성을 압제한 사례는 잘 발견되지 않는다.


천명사상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동아시아의 군주들은 기본적으로 천(天) 즉 민(民)에게 권력의 정통성을 두고 있었고, 이러한 이념에 따라 동아시아에서는 군주와 귀족 사이에 일종의 이념적인 대립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에 왕권과 재상권 사이에 대립이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백성에게 권력의 정통성을 두었다고는 하지만, 귀족세력과 대립하고 있는 군주는 본래 외롭고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랬을까? 왕실이 있다고는 해도 수적인 면에서 군주는 귀족세력에게 밀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주 편이라 할 수 있는 백성은 멀리 있고 군주의 대립자인 귀족은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백성에게는 별다른 사회적 권력(경제력·군사력·정보력)이 없지만, 귀족에게는 그런 무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백성은 조직화되어 있지 않지만, 귀족은 비교적 조직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군주는 귀족과의 대결에서 고독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군주에게는 또 다른 '힘 있는 남자'들이 필요했다. 그들이 바로 내시이고 환관이었다.


내시를 '힘 있는 남자'라고 하니까, 표현이 좀 어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시들은 정말로 힘 있는 남자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군주의 통치를 보조하는 데에 필요한 여러 가지 기술적 지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군주를 보좌하도록 훈련받은 사람들이었다.


군주의 입장에서 볼 때에, 충성스러운 관료보다는 충직한 내시가 더 믿을 만한 존재였을 것이다. 동아시아 전통시대의 관료들은 대개 귀족이나 사대부 출신의 유교적 지식인들이었다. 그런데 유교 이론은 신권(臣權)보다는 왕권을 제약하는 측면이 더 컸다. 폭군방벌론이 그것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관료가 아무리 충성스러울지라도 그 역시 언제 돌변하여 "폐하, 아니 되옵니다!"를 외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귀족이나 사대부 출신의 관료인 경우, 군주의 정책이 자기 집단의 이익을 침해한다고 판단되면 "금상(今上)에게서는 천명이 떠났다"며 반기를 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에 반해, 내시들은 달랐다. 그들은 신체의 특정 부위만 없는 게 아니라, 군주가 보기에 '더 중요한 그 무엇'도 없었다. 그것은 바로 군주의 권력을 위협할 만한 사회적 권력이었다. 대개 가난하거나 미천한 집에서 태어난 사람들인데다가 어려서부터 군주만 쳐다보면서 살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내시들에게는 군주를 위협할 만한 사회적 무기가 별로 없었다.


또 궁녀와 비교할 때에, 그들은 군주에게 사심을 가질 만한 이유가 별로 없는 사람들이었다. 궁녀들은 군주에게 성적 욕구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궁녀들의 충성심은 남녀관계가 그렇듯이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시들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없었다. 


또 왕실의 남자 구성원들과 비교할 때에도, 내시들은 군주가 신뢰할 만한 존재였다. 왕이 아닌 남자 왕족은 왕의 자리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내시들은 그럴 가능성이 없으므로 왕이 의심할 이유가 별로 없었다.  


그리고 내시들은 군주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을 최고의 가치로 배운 사람들이기 때문에, 군주가 설령 실정을 저지른다 해도 군주를 배반할 가능성이 낮았다. 군주가 귀족의 이익을 침해한다 해도 그렇고 또 설령 군주가 백성의 이익을 침해한다 해도, 내시들은 어디까지나 '왕의 남자'들일 뿐이었다.


바로 이러한 충성스러운 내시들이 있었기에 동아시아 군주들은 귀족이나 사대부와의 대결에서 힘의 균형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그들이 없었다면, 군주가 귀족이나 사대부를 억누르고 애민정책을 펴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애민정책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백성을 위하는 정책인데, 이런 정책을 펴다 보면 자연히 귀족이나 사대부의 이익을 침해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과거에 합격한 관료들이 왕의 정책을 수용할 가능성이 낮아지게 된다.


평소에는 충성스럽던 신하도 막상 자기 집단의 이익을 침해하는 정책이 시행되면 '천명이 떠났다'면서 자신의 변절을 합리화할 가능성이 있다. 이런 경우에 왕이 속마음을 터놓고 '작전'을 의논할 대상은 유능한 내시들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동아시아의 내시는 본질적으로 군주와 귀족의 대결에서 군주의 권력을 보조하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들의 존재는 기본적으로 군주의 애민정책에 긴요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군주나 백성의 입장에서는 내시를 적대시할 이유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

 
구중궁궐 같은 중국의 자금성. 환관(한국의 내시)들은 이곳에서 평생 황제만 바라보면서 살 수밖에 없었다.
ⓒ 김종성
 

"그렇지만, 내시들이 군주를 독살하고 부정부패를 일삼은 사례가 많지 않으냐?"고 질문할지 모른다. 그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내시들이 군주를 독살한 경우에도 그것은 또 다른 '차기 군주'와의 모의 하에 그렇게 한 것이지, 아무런 배경도 없이 그런 짓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그런 경우에도 그들은 기본적으로 '왕의 남자'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귀족이나 사대부 편을 든다면, 그 순간부터 그들은 존재의 의의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존재의의는 귀족이나 사대부와의 대결에서 군주를 보조하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시들이 뇌물을 받고 매관매직을 하는 등 부정부패를 일삼은 사례에 대해서도 좀 더 숙고가 필요하다. 내시가 판치고 다니는 세상은 그만큼 귀족 혹은 사대부가 기죽어 사는 세상이다. 그리고 귀족이나 사대부가 기죽은 시대는 바로 군주의 권력이 왕성한 시기다.


오스만제국의 사례에서 언급한 것처럼, 술탄의 권력이 전성기일 때에 궁정노예들이 전면에 등장했다. 이것은 자신의 수하들을 권력 전면에 내세워도 좋을 만큼 군주의 권력이 강화되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한국이나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내시들이 판치고 다닌다는 것은 그 뒤에 군주의 비호가 있으며, 또 그렇게 해도 될 만큼 군주권력이 강화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군주와 귀족(혹은 사대부)의 대결에서 군주권이 상대적으로 강화되어 군주를 견제할 사회세력이 약화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군주와 귀족이 팽팽하게 대립할 때에, 군주는 백성을 자기편으로 만들려 한다. 하지만, 귀족에 비해 압도적 우위를 점한 상태에서는 굳이 백성에게 기대려 하지 않는다. 그런 경우에 군주는 자신의 비대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불법자금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군주가 직접 나서서 부정한 돈을 거둘 수 없으니, 그 수하들인 내시가 나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시들이 부정부패를 일삼고 권력을 전횡하는 상황은, 실제로는 군주가 그 배후에 있었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아무 배경도 없는 내시들이 군주와 귀족 양편을 동시에 억압하고 그 같은 부정부패를 일삼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어느 한 쪽이 내시를 비호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귀족들은 내시를 비호하지 않으니, 군주가 그 배후에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내시들이 부정부패를 저질렀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문자 그대로 믿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귀족 관료나 사대부 관료와 달리 내시들은 본래 재산을 축적할 이유가 별로 없는 사람들이다. 인간의 욕심은 대개 성욕이나 가족 때문에 생기는 것인데, 그런 것이 없는 사람들이 불법 재물을 얻기 위해 정치적 모험을 감행했으리라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물론 내시들마다 개인차는 있었겠지만, 그들은 기본적으로 큰 욕심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군주가 그들을 기용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치적으로 볼 때에 내시의 부정부패는 분명 왕의 부정부패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에는 내시의 부정부패라고 기록되어 있다면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될 수 있을 것이다.


오스만제국의 술탄들이 궁정노예를 대재상으로 내세운 이유 중의 한 가지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신의 정치적 책임을 노예에게 떠넘기기 위해서다. 대통령제 국가인 한국에서 총리라는 '이상한 제도'를 두고 있는 데에도 유사한 이유가 작용하고 있다. 헌법학자들의 지적처럼, 총리를 '방탄용'으로 쓰려는 목적이 부분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내시들이 직접 나서서 불법 재물을 모으는 것은, 대개의 경우 군주의 비호나 지시 하에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군주가 비밀 정치자금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에 내시들이 나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경우 내시들이 주범이라고 역사에 쓰여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보스를 위해 정치자금을 수집한 보스들이 검사 앞에서 자신의 단독 범행이라고 우기는 경우와 별로 다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내시들에게 불리한 기록이 역사에 남는 것은 그들의 신체조건으로 볼 때에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역사에 긍정적으로 기술되려면, 후손들의 지위가 든든해야 한다. 군주나 귀족들에게는 그런 후손들이 있다.


하지만, 내시들에게는 양자 외에는 후손들이 없다. 훗날 자기 조상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역사 기록을 정정해달라고 요구할 후손들이 그들에게는 없는 것이다. 내시가 역사에서 부정적 이미지로 남는 데에는 이처럼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또한 내시를 비호해줄 지식인 같은 사회세력이 없기 때문에 역사에는 그들에게 불리한 기록이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어쩌면 역설적으로 그들의 청렴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해서 자기편을 만들지 않았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해서 내시들은 정말로 불쌍한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남자 구실을 못해서가 아니다. 평생 군주에게 충성하면서도 때로는 군주의 잘못까지 대신 뒤집어쓰고 그것도 모자라서 두고두고 역사에서 '나쁜 놈'으로 기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내시는 본질적으로 군주의 정치권력에 보탬이 되는 존재였는데도 오늘날에는 왕을 위협하던 존재로까지 묘사되고 있으니, 그들은 어디 가서 이 억울함을 호소해야 할까? 그들의 후손을 남길 단서는 '항아리'에 들어가고 없으니, 어느 누가 나서서 그들의 한을 풀어줄까?

-- 출처 : 오마이뉴스(www.ohmynews.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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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다할아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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